체코 드라마 <타오르는 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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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체코 드라마 <타오르는 불씨>
1969년 1월19일,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에서 한 청년이 제 몸을 불살랐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광장의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우왕좌왕한다. 청년의 가방에서 발견된 유서도 놀라웠다. 그는 소련의 무력침공에 항의하는 뜻으로 분신을 택했으며, 압제가 중단되지 않는다면 자신과 같은 이들이 계속해서 나오게 될 것이라고 썼다. 자유를 향한 길고 뜨거운 투쟁의 서막이었다.
세계적인 영화감독 아그니에슈카 홀란트가 연출한 티브이 미니시리즈 <타오르는 불씨>는 체코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순간 가운데 하나인 얀 팔라흐의 분신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미 공개된 역사임에도 그 도입부는 가히 충격적이다. 일견 평화로워 보이는 광장의 일상적 풍경 한구석에서 조용히 제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이는 앳된 청년의 모습. 프라하대학 철학부 학생이던 얀 팔라흐의 나이는 불과 스물한살이었다. ‘프라하의 봄’이 짓밟힌 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난 그의 죽음은 민주화 투쟁의 불씨를 되살린 숭고한 희생이었다.
광장 분신 장면 이후, 드라마는 당시의 실제 역사 속으로 들어간 듯 생생하게 뒷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여느때와 다를 바 없던 하루를 시작했다가 분신 소식을 듣고 충격에 휩싸여 병원으로 달려가는 가족들, 고통 속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얀 팔라흐에게서 정보를 캐내려는 경찰들, 그의 유서 내용을 널리 전하려는 학우들, 그리고 얀의 말대로 분신항거를 이어간 얀 자이츠와 에브젠 플로체크의 모습까지, 수많은 인물들의 다중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마치 하나의 불씨가 들불로 번져가는 풍경을 닮았다.
그 가운데서도 중심이 되는 것은 얀 팔라흐의 저항을 정신이상자의 광기로 폄훼한 정부 고위층 인사와 그에 맞서 아들의 명예를 지키려는 가족의 이야기다. 얀의 어머니(야로슬라바 포코르나)는 진보 성향의 변호사 다그마르 브레쇼바(타티아나 파우호포바)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재판을 통제하려는 권력층과 그 위협 아래서 승산 없는 재판에 최선을 다하는 이들의 모습은 이것이 단순히 한 개인의 명예회복을 넘어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투쟁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 지난한 투쟁의 과정에서 어느새 분노를 잊어가는 이들, 살아남기 위해 진실 왜곡을 돕는 이들, 위험을 무릅쓰고 시대의 증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 등 다양한 입장이 교차하고 그만큼 ‘프라하의 겨울’은 점점 길어진다. 우리는 이미 역사를 알고 있다. 체코에 완전한 봄이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무려 20년 뒤. <타오르는 불씨>가 얀의 분신 후에 오히려 더 어둡고 험난한 투쟁에 집중하며 생생한 세밀화를 그려낸 것은 그처럼 승리가 쉽게 따라오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럼으로써 역사를 바꾼 것은 영웅적 희생 자체보다 남아 있는 자들의 끈질긴 싸움이었음을 증명하는 치열한 사투의 드라마다.
김선영 티브이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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