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드라마 <페이지 에이트>
|
[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영국드라마 <페이지 에이트>
영국 보안정보국 소속 정보원 조니 워리커(빌 나이)는 상사이자 절친한 친구인 베네딕트 배런(마이클 갬번)으로부터 일급기밀 문서 하나를 건네받는다. 8쪽짜리에 불과하지만 영국 정부뿐 아니라 세계를 뒤흔들 만한 파괴력을 지닌 정보가 기재된 문서를 두고 정부와 정보부의 입장이 판이하게 엇갈린다. 설상가상으로 베네딕트는 문서를 공개한 다음날 심장마비로 급작스럽게 숨지고, 조니는 문서를 폐기하라는 정부의 압력에 시달리며 미행과 감시의 대상이 된다.
<페이지 에이트>는 독특한 분위기의 스파이물이다. 영국산 스파이물의 고전이자 대명사인 007 시리즈가 해외정보국을 배경으로 하는 데 반해, 영국 내 정보담당기관 정보원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페이지 에이트>에는 당연히 세계 각국을 오가는 커다란 규모의 첩보활동도, 화려한 액션도 없다. 조니 워리커는 근육질의 액션 영웅이 아니라 한물간 노땅 취급을 받는 듬성듬성한 머리숱의 백발노인이고, 이야기는 주로 사무실이나 응접실 안에서 펼쳐진다. 의문의 기밀문서, 국제적 스캔들, 정보원의 사망과 정치적 음모 등 긴장감 넘치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전개가 심심하고 밋밋하기까지 한 이유다.
하지만 바로 거기에 이 작품의 탁월함이 있다. <페이지 에이트>는 국가 안보를 위해 외부의 적과 싸우는 영웅적 스파이의 활약 대신 영국의 복잡한 대내외적 정치환경 속에서 정부의 부속품이 되어가는 정보국의 상황과 이를 바라보는 정보원들의 내적 갈등에 초점을 맞춘다. 가장 대표적인 장면이 조니와 그의 옛 동료이자 후배 롤로(유언 브렘너)와의 대화 신이다. 롤로는 냉전시대에는 빨갱이를 만들어달라고 하고 대테러 시대에는 아랍인을 적으로 만들어주길 원하는 정부의 태도를 비판하고, 조니는 정치에 상관없이 지켜야 하는 스파이의 신념에 대해 이야기한다. “정보의 목적은 진실을 찾는 것이지, 기존의 믿음을 확인하는 게 아니”라는 조니의 말은 정보원으로서 근본적인 윤리적 고민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말하자면 <페이지 에이트>는 에드워드 스노든이 폭로한 미국의 국제적 불법감청 스캔들이나 국내의 국가정보원 해킹 의혹 스캔들에서 볼 수 있듯이 정보기관이 국가의 정치적 도구로 전락한 시대에 대한 첩보물의 자의식이 반영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극중에서 시민의 자유와 안전보다 국가의 안보와 이익을 우위에 놓고, 정보국을 통제하려 드는 영국 총리 앨릭 비즐리(레이프 파인스)의 모습은 결코 낯설지 않다. 물론 그러한 정부에 저항하며 독자적인 진실과 신념을 추구하는 정보원의 모습은 많이 낯설지만 말이다.
김선영 티브이 평론가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