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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1.15 20:35 수정 : 2016.01.16 09:52

영국 드라마 <시와 점심>

[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영국 드라마 <시와 점심>

데이비드 보위 부고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앨런 릭먼이라는 또 한 명의 걸출한 스타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고를 알리는 국내 기사 대부분은 그를 대중적으로 널리 알린 <해리 포터>시리즈의 스네이프 교수라는 수사를 앞에 달았지만, 많은 팬들은 또다른 작품을 먼저 떠올렸을 것이다. 2010년 제작된 <비비시>(BBC) 단편드라마 <시와 점심>이다. 국내에서는 2011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공영티브이총회(INPUT) 개최를 기념해 해외 걸작 드라마로 방영된 적이 있다.

불과 45분 남짓한 길이의 단편에서 팬들은 앨런 릭먼 특유의 매력적인 중저음 목소리를 만끽할 수 있다. 크리스토퍼 리드의 시를 각색한 드라마는 화자의 내적 독백으로 가득 채워져 있고 앨런 릭먼의 섬세하면서도 리드미컬한 목소리는 극에 온 신경을 집중하게 만든다. 뚜렷한 내러티브도 따로 없다. 그저 한 중년 사내의 공허한 일상과 단절된 자아를 시적 독백으로 따라간다. 극 초반 남자(앨런 릭먼)의 상상 속에서 잠시 스쳐 지나간 시인 티 에스 엘리엇의 <제이 앨프리드 프루프록의 연가>가 연상되기도 한다.

남자는 15년 전 헤어진 연인(에마 톰슨)과 추억의 식당에서 점심 약속을 잡는다. “과거의 관음자”인 남자는 여자와 관련된 모든 것, 심지어는 식당 “유리 물병의 목 부분에 난 손자국”까지도 기억한다. 하지만 시간은 너무 많이 흘렀고 세상도 변했다. 전통을 지켜왔던 이탈리아 식당은 그 주변의 상점들처럼 개성 없이 획일화된 흔한 음식점이 되었고, 늘 웃고 있던 주인과 직원도 젊고 멋진 직원들로 바뀌었다. 오랜만에 재회한 연인만은 변함없이 아름다웠으나, 대화를 나눌수록 그들은 시간의 파괴적 힘과 깊은 단절을 실감한다. 남자는 그토록 그리워했던 여자를 앞에 두고 점점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작품의 진정한 묘미는 짧은 시간 안에 드러나는 남녀의 관계 변화다. 책 편집자인 남자는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바탕으로 단 한 번 시집을 출간했으나 이렇다 할 반응을 얻지 못한 경험이 있다. 연인은 그의 실패한 시를 두고 그것은 사실 자신과의 사랑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남자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라고 지적한다. 뮤즈라고 생각한 여자는 비평가가 되어 시와 남자의 결정적 문제점을 정확히 꼬집는다. 이는 과거 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어긋났는지에 대한 실마리이기도 하다.

김선영 티브이 평론가
한잔의 농축된 포도주처럼 생의 아이러니를 고도의 밀도로 담아낸 수작이다. 연기도, 대사도, 배우들도 모두 아름답기 그지없다. 극의 후반부 대사는 앨런 릭먼에 대한 추모의 말로도 손색없다. “그는 이제 말에 올라 떠날 준비가 되었다. 그 전에 추억의 식당에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해야지.”

김선영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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