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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0.14 20:04 수정 : 2016.10.14 20:15

[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미국드라마 <피치>

지니 베이커라는 소녀가 있다. 어릴 때부터 투구에 재능을 보인 지니는 메이저리거가 꿈이었던 아버지와 함께 밤낮으로 실력을 연마하여 어엿한 야구선수로 자란다. 남자 선수들과의 대결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공의 움직임을 예측하기 어려워 ‘마구’로도 불리는 스크루볼을 주무기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상품성과 실력을 알아본 프로야구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가 계약을 제안하고, 마이너리그에서 5년간의 경력을 쌓은 지니는 23살이 되던 해 마침내 꿈의 무대에 서게 된다. 메이저리그 최초의 여성 선수가 된 것이다. 등번호는 43번.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였던 전설적 타자 재키 로빈슨의 등번호 바로 뒷자리였다.

재키 로빈슨 언급 부분을 제외하고,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물론 허구다. 하지만 상상만으로도 더없이 황홀하다. 이 짜릿한 상상의 설계자는 미국 폭스채널에서 지난달부터 방영을 시작한 새 드라마 <피치>다. 지니 베이커(카일리 번버리)가 메이저리그 첫 여성 투수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요즘 할리우드 영화에서 유행하는 젠더 스와프 현상처럼 대중문화 속 유리천장 부수기 작업의 일종이다. 드라마 속 지니의 모든 행보는 사실적이기보다는 상징적으로 그려진다. 흑인이자 여성으로서 주류 사회에 도전하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곧 소수자 역사의 진보라는 무게를 지니며 일찍이 재키 로빈슨이 묵묵히 걸어갔을 개척의 행로를 상상하게 만든다.

야구라는 배경도 의미심장하다. 다국적 다인종으로 이루어진 메이저리그는 그 자체로 미국 사회의 축소판과 같다. 더군다나 포지션이 다양하고 점수를 획득할 수 있는 경로가 많아 신체적 열세를 지닌 선수도 다양한 장기로 살아남는다. 단신이어도 빠른 발로 게임을 지배할 수 있고, 느린 발에 과체중이어도 빠른 공을 멀리 날려버릴 수 있는 힘으로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다. 여성이라고 안 될 이유가 없다. 지니 베이커의 무기가 스크루볼이라는 점도 상징적이다. 마음먹은 곳에 꽂아 넣을 수만 있다면 더없이 위력적인 이 구종은 대신 엄청난 노력을 통해서만 제대로 된 구사가 가능하다. <로스앤젤레스 데일리 뉴스>는 리뷰에서 지니의 스크루볼 자체가 남성 중심 사회의 유리천장을 뚫고 올라가려는 여성들의 지난한 노력을 은유한다고 분석했다.

스포츠드라마로 볼 때는 단점도 뚜렷하다. 약점을 지닌 주인공이 시련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성공서사가 전형적이고, 지니를 제외한 주요 캐릭터들은 평면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구자로서의 주인공이 이끌어내는 감동이 몇번이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든다. 가령 지니의 역사적인 빅리그 데뷔 순간, 경기장에 몰려든 꼬마 소녀들이 ‘내가 다음 타자예요’라는 팻말을 들고 환호하는 모습이나, 마운드에서 부담을 떨치지 못하는 지니를 격려하는 무수한 관중들 중에 압도적인 소수인종 여성의 비율 등은 이 드라마가 정확히 계산한 감동의 스트라이크존에 속구로 날아와 꽂힌다. 포스트 시즌이 한창인 계절에 야구만큼이나 흥미진진한 볼거리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김선영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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