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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9.29 20:00 수정 : 2017.09.30 09:34

[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일본 드라마 <납치여행>

초등학교 5학년 하루(도요시마 하나)의 여름방학은 우울하다. 가족과의 해외여행을 자랑하는 친구의 말에 ‘격차사회’의 현실을 거론할 정도로 조숙한 이 소녀에게 방학이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더 길어진 것에 불과할 뿐이다. 2개월 전부터 아빠(쓰마부키 사토시)와 엄마(기나미 하루카)가 별거에 접어든 올해는 특히 그렇다. 항상 바빴던 엄마는 가계 부담 때문에 더 분주해졌고, 하루의 유일한 놀이상대였던 이모마저 남자친구가 생겼다. 가족과의 여행으로, 학원 합숙으로 제각각 바쁜 친구들과 달리, 하루의 방학은 첫날부터 무료하기만 하다. 그런 하루 앞에 누군가가 찾아와 말한다. “널 납치하겠다.” 언제나 제멋대로인 아빠 타카였다.

<납치여행>은 조숙한 딸과 철없는 아빠의 짧은 여행을 그린 드라마다. 일본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로 떠오르고 있는 가쿠타 미쓰요의 동명소설을 영상화했다. 심각한 제목이 실은 ‘싱거운 장난’이었던 것처럼 그 어떤 극적인 사건도 없이 열두 살 소녀의 심리를 차분하게 따라갈 뿐이지만, 여행의 끝에 이르면 어느새 하루의 키가 훌쩍 자란 것을 목격하게 되는 수려한 성장담이다. 하루의 여행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은 주로 밤 시간에 일어난다. 화가 난 하루를 달래기 위해 아빠가 데려간 밤의 해변에서 처음으로 느껴본 ‘바다의 따뜻함’, 남들이 버리고 간 구멍 난 텐트 안에서 바라본 유성, 유령이 나올 것 같은 밤의 숲에서 발견한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반딧불이의 불빛…. 어두워진 뒤에야 비로소 빛을 발하는 존재들은 일찍부터 생의 우울을 깨달은 하루에게 앞으로도 긴 위로가 될 것이다.

<납치여행>은 훌륭한 가족물이기도 하다. 드라마는 하루 부모가 별거한 사연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하루에게 중요한 건 온 가족이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다는 사실이다. 늘 바쁜 엄마도, 제멋대로인 아빠도 모두 자기 사정만 생각하는 ‘형편없는 어른’들일 뿐이다. 특히 빈털터리인데다 무기력한 아빠는 더욱 보잘것없이 느껴진다. 보통의 가족물이라면 사이 나쁜 부녀가 결국은 서로의 진심을 깨닫고 화해하는 결말을 따라가겠으나, <납치여행>은 조금 다른 노선을 취한다. 물론 하루도 아빠를 좋아하게 되지만 그것이 곧 관계의 회복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는 우리 모두가 가족이기 이전에 한 개인임을 이야기한다. 가족 해체 시대를 바라보는 작가 가쿠타 미쓰요의 성숙한 시선이 드라마에도 잘 옮겨져 있다. 한쪽에서는 가족 해체의 극단적 사례를 나열하는 ‘막장드라마’가, 또 다른 쪽에서는 가족애를 강조하는 가족예능이 양분하고 있는 국내 대중문화에서도 가족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선영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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