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2.08 19:43
수정 : 2017.12.08 20:05
[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캄보디아·미국 합작드라마 <그들이 아버지를 죽였다>
5살의 로웅 웅(사레움 스레이 목)은 유복한 대가족 안에서 해맑게 자란 소녀다. 하지만 로웅의 평온한 일상은 검은 옷과 빨간 스카프 차림의 낯선 군대가 도시를 점령한 날 이후 산산이 부서진다. 정부군 소속 대위였던 아버지는 신분을 숨긴 채 위태로운 위장생활을 하고 아직 어린 오빠 둘과 큰언니는 전선으로 끌려간다. 한밤 중 찾아온 빨간 스카프 군대가 아버지마저 잡아가자 어머니는 로웅을 비롯해 남은 세 자녀에게 도망가라고 이야기한다.
“각자 다른 방향으로 가. 킴은 남쪽, 초우는 북쪽, 로웅은 동쪽으로 가. 수용소가 나올 때까지 계속 걸어야 해. 고아라고 말하면 받아줄 거야. 아무한테도 진짜 이름을 말하지 마. 그러면 하나가 잡혀도 나머지는 무사할 거야.” 넷플릭스 오리지널 단막극 <그들이 아버지를 죽였다>(원제 ‘First They Killed My Father: A Daughter of Cambodia Remembers’)는 캄보디아 크메르루주 정권하 폭력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1975년 친미파 우익정권 론 놀 정부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급진 공산주의 무장단체 크메르루주가 공산혁명의 미명 아래 자행한 대학살의 이야기다. 이미 롤랑 조페 감독의 1985년 영화 <킬링필드>를 통해 널리 알려진 역사지만, <그들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영화가 가지 못한 새로운 길을 간다.
우선 이 참사의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 미국 닉슨 행정부나 캄보디아를 둘러싼 국제 정치에 대한 성찰이 보이지 않는다는 <킬링필드>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드라마의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크메르루주의 잔혹한 폭력이지만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것은 미국의 만행이다. 특히 미국이 2차 대전 당시 일본에 투하한 폭탄 16만톤의 수십 배에 해당하는 270만톤을, 그것도 비밀리에 캄보디아에 쏟아부었다는 마지막 자막이 남긴 충격은 꽤나 강렬하다. 더 인상적인 점은 이 드라마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혹한 역사를 딛고 살아남은 강인한 생존자의 기록이라는 데 있다. 더구나 그 주인공은 어린 소녀다. 그동안 수많은 전쟁 서사 속에서 어린 소녀의 존재란 베트남전의 그 유명한 사진 속 ‘네이팜탄 소녀’처럼 수난과 희생의 상징으로 기록되곤 했다. 그러나 <그들이 아버지를 죽였다>의 로웅은 어린 나이에도 전쟁의 비극을 뚜렷이 인지하고, 처참한 폐허를 가로질러 끝끝내 살아남는 모습을 보여준다. 로웅이 소년병 소속 당시 그 부대가 설치한 지뢰들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때 충격과 공포 속에서도 앞서간 이들의 발자국을 밟으며 위기를 벗어나는 장면은 이 드라마의 주제를 함축한 결정적 장면이다.
드라마의 이러한 시선에는 여성 작가의 원작과 여성 감독의 연출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그들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작품의 실제 주인공이자 현재 인권운동가 겸 작가로 활동 중인 로웅 웅의 회고록에 기초한 이야기이며, 유엔난민기구 홍보대사이자 캄보디아 시민권자이기도 한 앤절리나 졸리의 연출작이다. 로웅과 졸리는 공동각색자로도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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