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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5.24 19:53 수정 : 2019.05.24 19:56

[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미국 드라마 ‘체르노빌’

“그때 체르노빌에서 정상적인 것은 없었다.” 1988년 4월26일 모스크바, 한 남자가 긴 이야기를 마친 뒤 녹음테이프를 신문지로 감싼다. 남자는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척, 테이프를 숨겨 집 밖으로 나온다. 아직 어둠에 싸인 거리 한쪽에서 수상한 차가 그를 감시 중이다. 음식물 쓰레기통 옆의 폐건물 유리창 안으로 녹음테이프를 던진 남자는 집으로 돌아와 고양이에게 밥을 준 뒤 목을 맨다. 벽시계의 바늘이 1시24분을 가리키고 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를 극화한 <체르노빌>은 핵물리학자 발레리 레가소프(재러드 해리스)가 남긴 녹취기록으로 이야기의 문을 연다. 당시 원인 조사를 맡았던 레가소프는 모든 진실을 파악했음에도 정부의 압력에 못 이겨 은폐에 일조한 뒤, 죄책감에 시달리다 사고 정황을 녹음한 테이프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드라마는 레가소프 자살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6년 4월26일 새벽 1시25분. 체르노빌에서는 부소장 아나톨리 댜틀로프(폴 리터)를 포함한 모든 직원이 넋 나간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안전성 실험 도중 폭발이 일어났지만, 누구도 정확한 상황을 알지 못했다. 유일한 고성능 방사능 계측기는 금고에 있었고 열쇠는 어딨는지도 몰랐다. 댜틀로프가 소장에게 사고를 왜곡 보고하고, 이 보고가 다시 부장·부의장·중앙위원회를 거쳐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전달되는 동안 국민을 위한 대책은 없었다.

그 새벽에, 잠에서 깬 주민들은 거리로 나와 발전소 주변의 특이한 색 불빛을 구경했다. 누출된 방사능이 공기를 이온화시키면서 발생한 현상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구경하는 이들 머리 위로 방사능 재가 눈처럼 내렸다. 단순 화재 사고로 알고 출동한 소방관들은 방사능 누출에 대비하지 못하고 발전소 안으로 들어갔다. 아침이 밝아오자 밤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 주민들도 모두 일어났고, 아이들의 등교가 시작됐다. 방사능 재는 그 위로 계속 떨어져 내렸다.

<체르노빌>에는 재난드라마의 스펙터클이나 감상적인 휴머니즘, 영웅주의 같은 요소는 없다. 피해를 줄이기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 진실을 파악하려 애쓰는 과학자들 등의 노력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이 참혹한 비극에 대한 조금의 위안으로도 기능하지 않는다. 오히려 “향후 100년 동안 계속될 방사능 검출” 등과 같은 대사를 통해 참사가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사고의 심각성을 축소하는 관계자들의 책임 회피,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관료주의 등은 아직도 많은 재난에서 반복되고 있다. “거짓의 대가는, 거짓을 진실처럼 착각하는 게 아니다. 진짜 위험한 대가는 우리가 너무 많은 거짓에 속고 난 뒤, 더는 진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체르노빌>의 첫 대사는 이 인류 최악의 참사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을 말해준다.

김선영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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