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6.28 21:22
수정 : 2006.06.28 21:22
|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
나라살림가족살림
초빙연구원 자격으로 일본에 와 있다. 체재비를 부담해준 일본의 재단에 찾아가서 도착신고를 하고 점심을 얻어먹게 된 것까지는 좋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고급 외교관 출신이라는 재단이사장은 뜻밖에도 한국 정부가 지금 이 시점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급하게 추진하는 이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던진다.
예의 한국인다운 민족주의적 정서를 밑바탕에 깐 채 서투른 외국어로 답변하다 보니, 뜻밖에도 내 혀는 머리를 배반하여 경제학 교과서에 따르면 자유무역은 이론적으로 교역당사국 모두에게 좋은 것이므로 원칙상 반대하기는 어렵고 따위의 횡설수설을 늘어놓고 있다. 명색이 경제학자이면서 이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는 경제학의 금언을 잠시 잊었던 탓일까? 이때 얼핏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은 이십여년 전 대학생 시절, 화염병 던지며 뛰어다니던 친구들을 멀리하고 때로는 맞서다가도, 그들을 욕하던 어른들 앞에서는 울분을 토하며 그들을 변호하던 곤혹스런 내 모습이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관련된 논란 속에서 나는 대척적인 입장에 서 있는 경제학자들을 생각한다. 하나는 분명한 정권의 지지자이자 한 축이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준비되지 않은 자유무역협정에 대해 격렬하게 비판하면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하여 보수 언론으로부터 조롱받기도 하는 전직 청와대 비서관이고, 다른 하나는 연산일반균형모형(CGE)이라는 일반인에게는 생소할 뿐 아니라 나를 포함한 상당수의 경제학자들도 사실은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모형을 이용하여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득실을 따지는 보고서를 작성한 관변 경제학자 그룹이다.
양쪽 모두 적어도 실용적인 의미에서 분명 충실한 경제학자들이고, 그들의 주장 또한 모두 일리가 있다. 자유무역의 정당성을 가르치는 교과서들이 즐겨 전제하는 상황과는 달리, 한국과 미국은 결코 대등한 경제규모를 가진 나라들이 아니라는 점, 무엇보다도 예의 일본인이 지적한 충분한 준비나 사전연구가 안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하다.
연산일반균형모형, 아니 그 어떤 경제모형을 가지고 그 어떤 변수를 예측하더라도, 결국은 몇 가지 가정과 초기 조건에 의해 경우에 따라서는 원하는 대로 자유자재의 예측치를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업계의 상식’이며, 그래서 경제학에서는 수량적으로 확정된 어떤 방정식이나 수학적 관계를 통해서도 경제를 표현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근본주의적인 경제학자들도 있는 형편이다. 그렇지만 말이다. 부정확하고 자의적인 측면이 강한 모형일지라도 그것을 이용하여 무엇인가 예측이라도 해 보는 것이 아무것도 안 해 보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며, 자유무역협정에 대비한 충분한 사전연구 속에 그런 것들도 결국 포함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중요한 것은 이런 모든 논의들이 충분히 활성화되어야 했다. 경제민주주의란 경제적 행위의 영향을 받는 당사자들에게 충분한 발언권과 토론 기회를 주는 것이라는 흔히 간과되는 또다른 교과서적 원칙은 지켜져야 했다.
사실 자유무역이 유익하다는 것은 드물게도 97% 이상의 경제학자들이 동의하는 신념 수준의 교리다. 문제는 신념만으로 무장한 채 내 갈 길을 간다며 밀어붙이는 정치권력과 경제관료들 앞에서 그 어떤 경제학자들의 연구도 결국은 빌미일 뿐 현실적인 의미는 없는 것이라면, 결국 경제학자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거리로 뛰쳐나가든가 연구실 한구석에 처박혀 모형이나 주물럭거리고 있는 것뿐이라는 데에 있다.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