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8.23 21:06
수정 : 2006.08.23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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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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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살림가족살림
요즘 사회과학계에서는 ‘1987년 체제’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곤 한다. 벌써 20년 전인 1987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군사정권 아래에서 여당 전국구 의원 자리를 노린다던 소문이 파다하던 어느 교수는 재정학 시간에 정치인의 모든 행동은 득표 극대화 원리, 곧 최대한 많은 표를 얻기 위한 목적 하나로 설명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나는 속으로 당신 같은 정치인(?)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정치인도 있다고 되뇌었다. 애석하게도 내가 그 교수의, 아니 정확하게는 경제학의 이론이 상당 정도 옳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깨닫기 시작한 것은 바로 1987년에 한국 사회가 ‘민주화’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여당 일각에서 제기된 사회협약이나 ‘잡 딜’(job-deal)은 적어도 현재로서는 그다지 환영을 받고 있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당장 내부의 이견은 제쳐놓더라도, 설사 의견통일이 된다 한들 정부여당에 그와 같은 협약을 주도할 만한 힘이 남아 있느냐가 문제다. 나는 문득 1987년 이후 보수야당 정치세력을 진보적으로 견인하자고 주장하다가 거꾸로 견인당해 갔던 수많은 ‘진보적’ 정치인들을 떠올린다. 그들은 견인당하는 차보다 힘이 모자라는 차가 끌차가 될 수 없다는 당연한 진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대통령마저도 이미 임기가 끝났느니 마느니 하는 구설에 휩싸이는 마당에, 본능적인 영리함을 갖춘 자본이 어떤 형태의 협약이든 선선히 응할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예를 들면 출자총액 제한제도가 과연 얼마나 심각하게 경영권을 위협하는 제도였는지, 투자 부진의 원인일 수 있는지 따위의 실증적인 문제들도 있다. 한편으로는 경영권 보호라는 당근만으로 자본으로 하여금 과연 이윤추구를 유보하면서까지 ‘사회적 책임’ 의식을 갖고 투자 활성화나 일자리 창출에 나서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이냐는 문제도 있다. 그렇지만, 좀더 근본적으로 도대체 사회협약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어야 하느냐는 규범적인 문제도 존재한다. ‘미워도 다시 한번’ 재벌의 경영권을 보호해줌으로써 개발연대에 누렸던 재벌 중심의 경제성장을 다시 기대할 수 있는 것인지, 그것이 총체적인 투자 부진이나 일자리 부족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냐는 문제도 존재한다. 민족 경제론적 문제의식으로 재벌체제를 뒷받침해주는 논의들은 다른 한편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균형적 발전이나 경제 민주화가 민족 경제론의 다른 중요한 축이었다는 점을 잊거나 애써 무시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이른바 투자 부진이나 일자리 부족의 밑바닥에는 그저 ‘좌파 정권의 무능’이나 ‘정책 오류’ 탓만으로 돌릴 수 없는 한국경제의 구조적 변화라는 문제가 가로놓여 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물결과 중국 경제의 비약적 성장 속에서 개발연대처럼 가격 경쟁력에 의거한 수출 주도형 성장을 유지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첨단적 기술수준을 바탕으로 하는 고부가 가치 부문만으로도 승부하기 어려운 ‘낀 위치’라는 현실이 있는 것이다. 재벌 중심의 수출 주도형 경제성장을 통해 어쨌든 양적 성장률과 고용수준을 유지하였던 예전의 방식으로 돌아갈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렇다고 시장논리에 맡겨서는 구조변화의 흐름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보가 배우는 유일한 학교는 경험이라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도 정치공학만으로 행동하지 않는 정치인이나 정치세력이 있기를 바란다. 사회협약이나 잡 딜의 제안이 좀더 진지하게 다듬어지면서 정권 재창출이나 권력투쟁 등의 문제와는 독립적으로 추구되기를 바란다.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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