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9.13 18:15
수정 : 2006.09.13 18:15
|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
나라살림가족살림
‘나라살림’을 걱정할 때와 ‘가족살림’을 걱정할 때의 가장 큰 차이는 공공의 이익을 고려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다. 공공 이익과 개인 이익 사이에 갈등을 가져다주는 대표적인 문제가 자녀교육 문제일 것이다. 나라살림 차원에서 점잖게 말하면 국가 백년대계라는 교육문제이지만, 가족살림 차원에서 노골적으로 말하면 어떻게 해서 자기 아이를 학벌피라미드 안에서 조금이라도 높은 곳으로 안전하게 올려놓을 것이냐다. 따라서, 교육의 문제는 개인적 차원에서는 철저하게 최소한의 비용을 들여 최대한의 수입을 목표로 삼는 인적자본 투자의 문제로 환원되어 버린다. 나라살림 차원에서는 학벌사회의 폐해를 걱정하면서도, 가족살림 차원에서 투자비용에 대한 수익률이 가장 높은 이른바 명문대학 진학을 온몸으로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지난 반세기에 걸친 입시경쟁과 그를 둘러싼 수많은 나라살림 차원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고 갈수록 악화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기에 세계화라는 새로운 수준의 문제까지 겹치면서 이미 국민경제 내에서 해결이 불가능한 수준으로까지 악화한다. 학벌피라미드를 부숴보려는 시도가 자칫 어설프게 이뤄지면, 구성원들은 글로벌한 학벌피라미드의 정점으로 직접 이동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미국 아이비리그로 바로 진학하려는 똘똘한, 게다가 상당수는 유복한 환경을 가진 학생들의 움직임은, 그것이 비록 양적으로는 미미한 비율에 그치더라도 기존의 학벌피라미드를 새로운 수준에서 확대 재생산하는 한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예컨대 서울대를 없앤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 것이다.
입시교육의 문제가 한국 경제가 처한 상황의 축도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한쪽에는 결국 ‘나라살림’의 문제를 ‘가족살림’ 차원의 경쟁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세력이 있다. 학생에게 학교선택의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하향평준화를 막고 국가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는 주장은 결국 자유로운 경쟁이나 무역을 통해 사회 전체의 후생 증대가 도모된다는 경제철학의 교육학 버전일 뿐이다. 사실 이들의 뜬금없는 우국충정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심각성은 오히려 현실은 이미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데 있다.
그 맞은편에는 교육의 공공성을 강조하고 성적순으로 줄세우기를 거부하는 세력이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국유화나 정부 개입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데 딜레마가 있다. 전통적인 패러다임의 붕괴에다 세계화라는 새로운 차원의 문제까지 겹쳤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엄연히 존재하는 학벌피라미드와 학교 사이 학력격차 속에서 10만등을 한 학생과 20만등을 한 학생에게 똑같은 등급을 부여하거나 내신점수 반영비율을 높인다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결과 승복을 어렵게 만들 뿐이다. 학벌위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물론 괴롭지만, 승복하기 어려운 룰로 결정된 위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더욱 괴롭다. 이미 무너져 내린 공교육의 한편에서 추상적인 공공성만을 외치는 것은 흘러간 유행가조로 얘기하자면 민중의 생활상 요구를 고려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일 수 있다.
가능한 한 비용을 적게 들이면서 자신만은 피라미드 안의 높은 위치로 가고 싶다는 ‘가족살림’ 차원의 욕구를 비난하거나 무시하지 않으면서 실현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 그것이 어렵더라도 추구해야만 할 길이다. ‘진보’의 대안이 구체적 수준에서는 오히려 ‘보수’의 대안보다 논리가 매끄럽지 못하고 괴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의 한 자락도 여기에 있다.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