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원 서울YMCA 시민사회개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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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사제이며 사상가인 이반 일리치는 그의 책 <병원이 병을 만든다>에서 서구식 산업문명 체제가 낳은 제도의 하나인 병원과 현대 의료의 비인격성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실제 그는 몸의 병을 키우면서도 굳이 병원에 가지 않았는데, 현대 의료체계에서 환자와 의사의 인격적 관계에 대한 불신의 표현이었다. 일리치의 비판과 관계없이, 병원이나 현대 의료체계에 의존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건강보험제도 속에 살고 있고, 비용을 부담하며 의료서비스를 이용한다. 병 치료를 위해서뿐 아니라 진단을 위해 또는 예방을 위해 의료기관을 일상적으로 찾고 있으며, 실제로 건강과 수명 연장의 혜택을 누린다. 사실 의료기관과 의료인의 행태도 변화하고 있으며, 많은 의료인들이 양질의 의료서비스 제공을 위해 궁극적으로 환자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의료기관과 의료서비스의 이용이 시민의 일상생활 속으로 들어오면서, 환자와 의사의 관계도 신뢰의 상호성이 중요해졌고 인격적 관계로 나아가는 좋은 변화도 많이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환자와 의사 간의 신뢰와 인격적 관계를 해칠 수 있는 불의의 사건들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이것이 의료분쟁 혹은 의료사고다. 오른쪽 폐암 환자의 왼쪽 폐 수술, 갑상선 환자의 위 절제, 위암 환자의 갑상선 제거, 개복 후 암이 없어 그냥 봉합 등 이미 뉴스로 알려진 대형병원의 대표적 의료사고가 아니더라도 매년 크고 작은 의료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연간 수천만건의 의료행위가 이루어지고, 모든 의료행위들이 개별성을 가진 인체를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의료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일 수 있다. 고의나 터무니없는 과실이 아니라면, 최선을 다했으나 예기치 못한 인체의 반응이나 현대 의료의 한계로 인해 나쁜 결과가 생긴 문제라면 의료인을 비난할 일은 못 된다. 문제는 환자가 얘기치 못한 나쁜 결과 또는 의료사고를 당했을 때, 원인을 모르는 환자는 의사가 뭘 숨기고 거짓말한다고 주장하고 의사는 환자가 떼를 쓰며 횡포 부린다고 생각하면서 버티고 싸우는 상황이다. 우리의 경우 정말 많은 의료사건 또는 분쟁이 이런 상황으로 치닫는 비극적 현실에 놓여 있다. 분명한 사실은 의료사고 또는 분쟁은 계속되리라는 점, 아직도 사고 발생 시 병원에서 혹은 숨진 사람의 영정 앞에서 멱살 잡고 몸싸움하는 야만적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점, 이런 비인격적 상황을 우리 사회가 방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1980년대부터 의료분쟁 조정법 혹은 의료사고 피해구제법 제정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왔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국회는 다른 일로 바빠서, 의료계와 시민단체도 여러 가지 쟁점을 풀지 못해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최근 몇몇 시민단체들이 연대해 의료사고 피해구제법안을 만들어 국회의원들을 찾아가 입법 노력을 요청하고 이번 국회에서 입법이 성사되도록 하기 위한 사회적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이 법안의 내용으로 분쟁조정위원회의 구성, 입증책임의 전환 문제, 재원 마련 문제 등 여러 쟁점이 있고, 또 의료계가 선뜻 받아들이기에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의사와 환자 간 인격적 관계를 위한 틀을 만드는 데 들이는 부담이라면, 환자를 돌보기 위한 의료행위 과정에 일어난 일로 의사들이 겪는 사회적 부담에 비하면 비싼 대가는 아닐 수 있다. 이제 의료분쟁 해결의 조속한 입법에 관심을 기울일 때다. 신종원 서울YMCA 시민사회개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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