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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0.04 22:52 수정 : 2006.10.04 23:03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최근 토니 블레어는 노동당 당수로서는, 그러니까 영국 총리로서는 마지막으로 전당대회에서 연설을 하였다. 그는 세계화가 영국 국민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가져다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썩어도 준치인지, 아니면 고도의 정치적 수사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십여 년 전 보수당 마거릿 대처 총리의 “대안은 없다”는 냉정한 선언에 비하면, 어쨌든 그가 노동당 출신임을 상기시켜주는 주장이었다.

사실 거부하기 어려운 세계화의 물결이 우리의 일상을 장악하고 있는 오늘날,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주어지는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또한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라는 것은 모든 이들에게 닥쳐오는 절체절명의 물음이라 할 수 있다. 십수만 명의 젊은이들이 공무원 되는 객관식 시험을 치기 위해 임시열차 타고 상경하는 모습도 결국은 그 ‘안정성’ 때문이다.

그런데 백 대 일이 넘는다는 공무원시험 경쟁률이 상징하는 것처럼 안정성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가능성이 절대적으로 부족할 때, 그것에 대한 개인적 차원의 열망은 집단적 차원의 불안정성을 체념하며 받아들이는 태도로 바뀌곤 한다. 더욱 나쁜 것은 종종 이러한 체념적 수용이 본질적으로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집단 내의 다른 분파들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는 점이다. 해서 근로조건이나 특히 안정성의 측면에서 비교우위를 갖고 있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파업이나 노조활동 등에 대해 사회학적으로는 같은 계급에 속하는 민간부문의 노동자들이 반감을 표시하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물론 반대로 ‘철밥통’과 높은 보수를 누리고 있는 이들이 불안정성에 노출된 취약한 이들의 아픔에 무관심할 뿐 아니라, 때로는 그에 기대어 이득을 취하는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케이티엑스(KTX) 여승무원들의 투쟁에 대한 인터넷 댓글을 읽어보면, 최근 사이버 공간의 보수화 경향을 감안하더라도, 전반적으로 결코 우호적인 여론이 아니라는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의외로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고 있는 논리는 안정적인 정규직 자리를 얻으려면 수백 대 일의 경쟁을 통과하는 것이 당연하므로, 그렇지 못한 이들은 그런 요구를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노동자집단 안에 두 개의 그룹이 있다고 하자. 두 그룹이 서로를 지지하고 협조하는, 쉽게 말해 단결투쟁을 할 때 집단 전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가장 많아진다. 그러나 다른 그룹의 투쟁에 협조하는 것은 여러모로 불편함과 손해를 가져올 수도 있다. 따라서 각 그룹별로 최적의 상태는 다른 그룹은 우리 그룹을 지원해주되, 우리는 상대방을 지원해주지 않으면서 성공의 결과를 독식하는 것이다. 두 그룹이 똑같이 생각하고 움직이게 되면 결국 서로 상대방과 단결 투쟁 하지 않으면서 집단 전체적으로는 최악의 결과를 얻게 된다. 이것이 경제학 교과서에서 말하는 죄수의 딜레마이고, 전형적인 분할통치(divide and rule) 상황이다.

물론 세계화로 인해 집단 전체의 안정성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은 이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안은 없다”와 “기회를 찾으면서 동시에 안정성을 확보하기”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결국은 “부딪히면서 길 자체를 만들어가는”(정운영, <자본주의 경제산책>) 이들에게 출발점은 서로 협력하는 것, 적어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태도여야 한다. 공무원노조 사무실 폐쇄라는 시대착오적인 이벤트나 한국은행의 연봉 논쟁, 그리고 다시 케이티엑스 여승무원 문제의 밑바탕에 깔린 진정한 문제는 이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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