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1.24 18:37
수정 : 2007.01.24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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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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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살림가족살림
〈한겨레〉 23일치 ‘왜냐면’에는 “박종철을 두 번 죽이지 않는 길”이라는 한나라당 당원 박종운씨의 글이 실렸다. 불길한 생각이지만 아마 지금의 우리 아이들에게 박종철이나 이한열이라는 이름은 주몽보다도 멀리 떨어진 낯선 이름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무자비한 공권력에 희생된 젊은 대학생을 기억하면서 무엇이 그의 정신이었던가를 논쟁하는 것도 어쩌면 앞으로는 보기 힘든 광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 한편이 착잡해진다. 그런데 일견 엉뚱하게도 논쟁은 시장경제에 대한 찬미론으로 옮아간 듯하다. 얄궂게도 문제의 지면에서 한 장만 앞으로 가면 한때 재벌 입장을 대변하면서 물불을 가리지 않던 공병호씨가 “시장에 대한 편견을 거두라”고 일갈하고 있다.
박종운씨의 시장경제에 대한 견해는 아마 그 나이 또래의 운동권 대학생들이 이십여 년 전에 가졌을, 어찌 보면 소박하기 짝이 없었을 관념의 거울이미지에 다름 아니다. 시장경제가 “우리가 매일매일 돈으로 투표”하는 “자율적이면서도 ‘실질적인’ 민주주의 체제”라는 주장이나, 한걸음 더 나아가 “시장경제는 정성이 부족한 자는 외면하고 충성심이 투철한 자에게 보상을 내릴 뿐이다”라는 주장은 짧은 지면이나 정치적 논쟁의 성격을 감안하더라도 시쳇말로 ‘오버’의 도가 지나쳤다. 박씨의 글이 행동대원의 저돌적인 소신으로 보인다면, “원하건 원하지 않건 무능하고 비효율적인 부분들에게 걸맞은 대우가 주어지는 사회로 인류는 계속해서 전진할 것”이라는 공병호씨의 주장은 마치 구루(guru)의 비장한 계시처럼 들린다.
박종운씨나 공병호씨, 또는 내 또래가 대학생이었을 무렵, 적어도 내 주위의 많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시장경제나 자본주의에 반감을 갖는 것은 일종의 트렌드였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들이 시장경제나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이라 생각했던 것의 많은 부분은 극단의 물리적 폭력으로 무장한 군사정권에 대한 반감에 다름 아니었다. 사실 군화로 짓밟지 않는 자본주의나 시장경제를 추상적 가능성으로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몸으로 깨달은 것은 제법 뒤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십여 년이 지난 오늘, 정반대의 맥락에서 똑같은 오해가 재생산되고 있는 셈이다. 민주주의가 좁게는 정치체제, 넓게는 생활세계를 관철하는 원리를 가리키는 말이며, 시장경제 또는 자본주의는 경제체제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기본적인 상식조차 이해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는 붉은 이리떼인 북한 공산주의의 대척적 개념으로 ‘한국적 민주주의’를 세워놓고 밤낮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주입시키던 박정희 체제의 사후복수라 생각된다. 더욱이 그 주체가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것을 민주주의라 불러야 하고 이를 경제체제를 가리키는 개념과 혼동하면서 자라야 했던 ‘박정희의 아이들’이라면 말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고 시장경제는 시장경제일 뿐이지 같이 뭉뚱그려 쓸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는 지당한 말조차도 이들에게는 이해되지 못한 셈이다. 사실 이러한 요지의 발언은 이들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 안병직 뉴라이트재단 이사장이 어느 인터뷰에서 한 것이기도 하다.
진짜 문제는 정치적 대안담론, 심지어는 학술논쟁의 그럴듯한 겉모양을 하면서, 실상은 천박하기 짝이 없는 주장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는 점이다. 23일 아침의 개운치 못한 기분을 똑같은 수준의 선동적 수사법을 사용하여 날려 보자. 과연 길거리로 내몰린 한국고속철도(KTX) 여승무원들은 정성이 부족한 자들이고, 손에 물 한방울 묻히지 않고 수십 개의 회사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는 재벌2세는 충성심이 투철한 자인가?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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