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2.16 17:22
수정 : 2007.02.16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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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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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살림가족살림
박노해의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시를 정성껏 타이핑해서 연구실 벽에 붙여놓고 읽던 적이 있었다. 개인적인 느낌인지 모르겠지만 ‘사람’이라는 말에는 분명히 가슴을 울리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예컨대 같은 뜻이지만 사람이 들어갈 자리에다 인간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으면 왠지 어색해지는 경우도 많다. 악명 높은 주체사상도 사실은 사람이 이 세상의 주인이라든지 사람은 자주성과 창조성을 지닌 유일한 존재라는 등속의 지당한 말씀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을 뿐이다.(주체사상이라는 말에 알레르기를 일으키고 국가보안법을 들먹이는 분이 있다면, 황장엽씨의 〈맑스주의와 인간중심철학〉이라는 책을 읽어보시라. 그 내용은 반미를 반김정일로 대체하였을 뿐 훌륭한 주체철학 교과서이고, 우리 사회에서 합법적으로 출간됐다.) 유적 존재와 같은 거창한 철학적 개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들 자신이 미물의 목숨까지도 소중히 여기는 도인이 되지 못할 바에야, 사람 중심으로 생각하자는 명제는 참으로 거부하기 힘든 것이다.
바로 그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협력하고 갈등하면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경제이므로, 경제도 사람 중심으로 하자는 말 자체는 그야말로 공자님 말씀에 다름 아니다. 사람 중심의 경제를 주장하는 것은 그래서 실천 없는 이론만큼이나 공허하면서도, 예컨대 많은 표를 얻는 것이 일차적 목표인 정치인들에게는 강렬한 매력을 갖는 구호가 될 수 있다. 경제학자들이 이름붙인 ‘중위투표자 정리’를 들어본 적이 없더라도, 중간쯤 가는 사람들의 머릿수에 의해 선거 결과가 결정된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사적 기준으로 보자면 오른쪽에서도 맨 끝에 서 있는 대권 희망자가 갑작스레 스스로를 ‘중도’라고 우기는 코미디도 결국에는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그 사람이 어떤 상황에 놓인 무슨 사람인지를 분명히 하지 않는 사람중심 사상은 공허함을 넘어서서 종종 위험하기조차 하다. 이미 150년 전쯤에 카를 마르크스는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사회관계 아래서만 그는 노예가 되는 것이다”라고 썼다. 경제를 살리자는 애타는 외침 속에 응급실로 실려 가는 ‘경제’라는 이름의 아픈 청년이 등장하는 오래된 한 토막의 코미디에서처럼 경제는 결코 단일한 실체가 아니다. 전경련의 경제, 대기업 노동조합의 경제, 비정규직 노동자의 경제, 영세 자영업자의 경제, 이렇게 수많은 다른 경제들이 하나의 이름으로 묶이고 그것의 성장이 핵심적 화두가 되는 순간, 드러내어 치유되어야 할 많은 문제들은 사라짐을 강요받게 된다.
조잡한 비유이지만, 청소년기에는 일년에 십센티미터씩 키가 크는 것도 흔히 있는 일이고 대부분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그렇다면 기뻐하기 전에 병원부터 가봐야 할 일이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가 아니라 3만달러가 되어도 모든 사람의 생활이 그에 비례해서 유복해지지는 않는다는 것, 성장률이 7%라고 해서 일자리가 7% 늘어나는 것도 아니라는 것, 이미 일상에서 늘 확인하는 평범한 진리를 잊도록 만드는 우리 신체에 각인된 성장에의 확신, 향수, 그리고 망각 등속은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그따위 허무한 주장에 갖은 성장요인을 찾아 보태서 숫자를 맞춰 놓는 경제학자들이 나의 동업자라는 사실은 절망적이기조차 하다. 그러므로 정치인에게 그런 달콤한 구호를 버리라고 강요하는 것도 무리다. 결국은 우리들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유혹에서 벗어나 고통스러운 현실을 바로 보고 고쳐 나가려는 노력을 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결국 다시 사람만이 희망인가?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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