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4.04 17:27
수정 : 2007.04.04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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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민/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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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살림가족살림
어떻게 조사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외국 학술지에 실린 어느 논문에서 경제학자의 97%가 자유무역 이론을 지지한다는 보고를 읽은 적이 있다. 그런데 내 주위에 있는 경제학자들 중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정확히 말해 지금과 같은 형태의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반대하는 이들이 더 많으니 아무래도 그들이 바로 경제학을 잘못 배운(?) 그 3%에 속하는 모양이다.
이미 한-미 자유무역협정 문제는 경제적 논란거리를 넘어 찬성이나 반대 어느 한편에 반드시 줄서도록 강요하는 정치적 이슈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심지어는 분신 노동자에 대한 언론의 보도자세조차 극명하게 두 편으로 갈리는 상황이 아닌가? 어차피 그런 것이 사회과학 이론의 운명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각종 경제이론은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여 이리저리 동원되고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현재와 같은 정치적 구도 때문에라도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는 이른바 국익 우선이라는 담론의 허구적 성격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은 한국팀이 미국팀에 두 골 내주더라도 세 골 넣으면 3:2로 이겨서 16강에 올라가는 에이(A)매치 축구경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사실 경제학의 비교우위론에 따르면 굳이 국익을 따져볼 필요조차 없다. 자유무역은 정의상 두 나라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자유무역은 모두에게 이익을 주는가? 찬성론자들이 전가의 보도로 꺼내는 소비자 잉여라는 개념 때문이다. 쉽게 말해 담배자판기 안에 국산 담배뿐만 아니라 미국 담배도 있으면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만큼 행복해지는 것이고, 그 미국 담배의 값이 내릴수록 행복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는 주장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찬성하는 쪽 신문들에 요 며칠 사이 실리고 있는 계몽적인 기사들, 예컨대 “몇 백 만원이나 싸진 포드자동차를 살까 말까?”로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는 ‘2010년 김 과장의 하루’ 따위의 기사에서 강조하는 점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경제현상을 소비자와 생산자라는 구도로 나누어 설명함으로써 현실을 잘 설명할 수 있는 경우보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기업가가 임금을 비용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자본가의 입장에 설 때 노동자는 이미 소비자가 아니다. 반면 노동자를 고용하여 생산한 상품을 팔아야 하는 생산자의 입장에 서게 되면 노동자는 매우 중요한 소비자가 된다. 그러므로 자본가의 입장에서 바람직한 것은 최대한 싸게 노동력을 조달하는 것이고, 생산자의 입장에서 바람직한 것은 그 노동력의 소유자들이 많은 임금을 받아서, 즉 높은 구매력을 가지고 내 상품을 사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나 케인스가 강조한 딜레마다. 마찬가지로 소비자의 이익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은 그 소비자가 어느 산업의 어떤 노동자냐라는 정체성과 함께 비로소 구체화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김 과장이 포드자동차 구입 여부를 고민하기 전에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는 것, 약간 경제학적으로 말하자면 정태인 전 국민경제비서관의 야유처럼, 정말 소비자 잉여가 목표라면 우리나라가 모든 나라 제품에 부과하는 관세를 즉각 다 철폐하면 된다(<프레시안> 4월2일치).
사실 97%의 경제학자가 자유무역을 지지한다는 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몇 가지 추상적이고 순수한 가정 하에서 성립하는 비교우위론의 논리적 정합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과서 속에서 추상화된 이론을 한국 대 미국이라는 현실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알고 한다면 기만이고 모르고 한다면 어리석음이다.
류동민/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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