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1.02 18:39
수정 : 2008.01.02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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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재/한겨레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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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살림가족살림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내가 열두 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도입했던 ‘용돈 제도’가 알려준 사실이다.
그전까지는 용도가 분명할 때만 돈을 타서 썼다. 참고서 구입처럼 큰돈을 써야 하는 일이나, 버스비처럼 작은돈을 써야 하는 일이나 똑같이 미리 용도를 특정해야 했고, 나중에 말로든 실물로든 증빙을 해야 했다. 그런데 이제 어머니는 하루 몇 백원씩을 쥐여주시며 무엇을 사든 알아서 쓰고 모아 보라고 했다. 떡볶이를 사 먹든, 버스를 타고 놀러 가든 모두 내가 결정하면 됐다. 증빙할 필요도 보고할 필요도 없었다. 한 살 더 먹은 내게 더 큰 자유가 주어진 것이다.
자유에 늘 따라붙는 ‘책임’이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의 존재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지갑 안에 모인 거금 5천원을 전자오락실에서 한꺼번에 날려 버린 날이었다. 떡볶이를 한동안 사 먹을 수 없는 것은 물론, 참고서나 준비물을 마련할 길도 막막해졌다. 증빙하거나 보고할 필요가 없어진 만큼 도움을 요청할 여지도 줄었다.
2004년 5월29일 청와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지금쯤 이런 깨달음을 얻었는지 궁금하다. 국회 다수당이 된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당선자들은 그날 노무현 대통령의 초청 만찬에 참석해 와인과 중국식 코스요리를 앞에 놓고 시위 현장의 애창곡인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했다. 노 대통령은 “기쁜 날이다, 너무 좋다”며 “분열의 역사를 극복하겠다는 일념으로 창당을 했기에 충분히 보상받을 일”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현장에 있던 한 의원은 “개혁세력이 이 사회의 주류로 등장했음을 확인시켜준 자리였다”며 감격했다. 지난해 12월 대통합민주신당의 대통령 선거 참패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좋은 일자리가 사라지고 취업이 어려워지고 장사가 어려워지자, 국민들은 승리를 자축하며 보상을 논하던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2007년 12월28일 전경련회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이런 교과서적 인과관계를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방문해 연 오찬 간담회에서 재벌 총수와 대기업 수장들 사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이 당선인은 “친기업 정부를 만들겠다”고 선언했고, “기업 활동에 어려움이 있으면 직접 전화하라”는 친절까지 보였다. 전경련 조석래 회장은 “이렇게 뜻 깊은 날이 없었다”며 감격했다. 몇몇 기업은 당장 몇 조원의 투자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 시대, 기업의 자유는 분명 늘어날 전망이다. 민주화 이후 20년, 그 못지않게 기업에 위압적이던 이전 권위주의 정부까지 합하면 수십년 동안 기업가들은 정부발 스트레스를 끊임없이 받았다고 한다. “친기업 정부” 시대, 그에 대한 보상심리가 없을 수 없다. 걱정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단순한 명제가 “친기업 정부”에 대한 감격과 흥분으로 덮여 버리지는 않을지. 그 와중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에 대한 논의가 수면 아래로 잠복하게 된다면 기업과 국민 모두에게 큰일이다.
자유가 커지면 책임도 커진다. 누군가 책임을 지고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는 여전히 나라 곳곳에 산적해 있다. 그런데 이 당선인 공언대로라면 국가와 공공부문의 역할과 책임은 뚜렷하게 축소될 전망이다. 지금까지 기업은 우리 사회 건전성이 흔들릴 때, 정부만 손가락질하며 불평하면 됐다. 그러나 전경련 오찬 이후 기업들은 이제 국민의 손가락질 앞에 직접 노출됐다.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한 국민은 자신이 겪는 불행에 대해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기 마련이다. 책임이 따르지 않는 자유는 회수되는 게 당연하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한국 경제 어느 시기보다도 더 중요해졌다.
이원재/한겨레경제연구소장
timelas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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