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5.28 19:39
수정 : 2008.07.18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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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재/한겨레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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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경제
세계적 기업 존슨앤존슨의 경영을 이야기할 때, 경영학자들은 창업자이자 소유주였던 로버트 우드 존슨보다 그의 뒤를 이어 기업을 이끈 ‘월급 사장’ 제임스 버크를 먼저 언급한다. 버크는 존슨앤드존슨에 대리급으로 입사해, 24년 만인 1976년 최고경영자 자리에까지 오른 뒤 13년 동안 회사를 이끌며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미국 샐러리맨의 신화’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신뢰받는 경영자였다. 그런데 그가 창업자보다 기업을 더욱 키우고 더 훌륭한 경영자로 기억되는 것은, 창업자와 구별되는 자기만의 정체성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버크를 일약 세계적 스타 경영자로 만든 것은, 회장으로 재직하던 1982년에 벌어진 ‘타이레놀 독극물 사건’이다. 당시 존슨앤존슨의 두통약 타이레놀을 복용한 일곱 명의 미국인이 그 안에 들어 있던 독극물로 사망했다. 경찰은 외부인이 판매점에서 주사기로 독극물을 주입했으므로 존슨앤존슨 쪽 과실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버크는 자발적으로 전국의 타이레놀 전체를 회수하며 1억달러(1천여억원)의 비용을 지출하고, 독극물 주사가 불가능하도록 정제형 타이레놀을 다시 내놨다. 결국 존슨앤존슨은 소비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재도약했고, 현재 미국에서 가장 평판이 좋은 기업으로 꼽힌다.
사실 이는 버크가 만든 자신만의 경영철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버크는 후계자로 지명되자마자 창업자가 만든 경영 신조에 도전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세계를 돌며 임원들을 직접 만나 경영 원칙에 대한 토론과 설득작업을 벌인다. 이 과정에서 수십 년 묵은 경영철학을 가장 현대적인 것으로 개정했고, 회사 의사결정 우선순위를 고객, 임직원, 지역사회, 주주 차례로 명시했다. 바로 이 원칙이 타이레놀 사건을 극복하게 했다.
세계 대부분 후계 경영자들은 전임자와 구분되는 자신만의 색깔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제너럴일렉트릭(GE)은 대표적 사례다. 제프리 이멜트 회장은 전임자의 그늘을 누구보다도 크게 느낄 만한 사람이다. 전임 회장 잭 웰치가 워낙 세계적으로 유명한 경영자였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고자 이멜트는 ‘에코매지네이션’(ecomagination; 친환경적 상상력)이라는 파격적 경영 전략을 전면에 내세우며 환경경영과 사회 책임경영을 강조한다. 웰치가 공격적 인수합병과 대량해고로 기업을 키웠고,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는 냉소적이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이멜트의 새로운 전략은 일단 방향은 옳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가까이는 에스케이 최태원 회장도 있다. 최 회장은 최근 유엔 글로벌콤팩트 이사로 선임됐다. 유엔 글로벌콤팩트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원칙을 만들고 전파하는 국제기구다. 이런 국제적 이니셔티브에 한국 기업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전례가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파격적인 일이다. 특히 에스케이가 과거 유공과 한국이동통신을 정부로부터 넘겨받아 성장한 ‘불하 기업’ 이미지를 갖고 있었고, 몇 해 전 분식회계 건으로 경영자들이 줄줄이 법정에 서고 지배구조를 바꿔야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놀라운 변신이다.
그러나 많은 한국의 후계 경영자들은 여전히 자신만의 색깔을 찾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있다. 한국 최대 기업집단 삼성조차도 그렇다. 이건희 회장이 퇴진을 선언했지만, 그 뒤 경영진의 색깔은 아리송하기만 하다.
후계자 노릇은 쉬운 게 아니다. 전임자의 성과가 좋을수록 더 그렇다. 전임자와 자신을 분명하게 구별짓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 실패하면 전임자의 성과마저 무너뜨리게 된다. 한국 기업의 ‘후계자’들한테서 색깔을 찾고 싶은 이유다.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장
timelas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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