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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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가 총에 맞아 죽은 바로 다음날 아침이었다. 사회선생님은 이제 유신헌법과 관련된 부분은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고 선언했다. 한 세대 전, 고입 연합고사를 얼마 남겨두지 않았던 중3 교실에서 일어난 일이다. 마치 마법에서 풀려난 신데렐라의 마차처럼, 전날까지만 해도 “학업성취도”를 판가름하던 사회교과서의 절반 정도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그 자리엔 썩은 호박 몇 덩이만 남았다. 나름 전략가 소리를 듣는다는 여당 국회의원이 또다시 전교조 교사 비율이 높은 고등학교일수록 수능성적이 떨어진다는 보도자료를 내놓았다고 한다. “분석결과”랍시고 써놓은 “친북 반미 정치교육” 운운하는 내용을 읽다가 떠올린 것은 바로 그 옛날의 사회시간이었다. 어쩌면 그 국회의원은 내 또래들이 받아야 했던 “반민주 친독재 정치교육”이 사람의 지적 능력을 얼마나 파괴하는지를 보여주는 실증사례일지도 모른다. 사실 전교조에 대한 대대적 공세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마침내 돌격대 노릇을 자임한 또다른 여당 국회의원이 법원의 결정을 무시하고 조합원 명단을 공개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수구 좌파 판사에 대한 결연한 대응” 같은 오래된 레퍼토리는 물론, 법원이 부과한 이행강제금 모금을 위한 콘서트를 연다느니 “아무개 펀드”를 만든다느니 하는 코미디프로그램 수준의 해프닝이 연일 이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며칠 만에 명단을 내리면서 사뭇 비장한 어투로 “돈 전쟁에서 졌다”는, 뛰어난 예능감을 과시한 예의 그 국회의원의 멘트일 것이다. 사실 이들의 경우 얼핏 돌출적인 행동처럼 보이지만, 전교조를 “악의 축”으로 삼아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극대화하려는 전략을 실행하는 것이므로 나름 경제학에서 말하는 “합리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전교조와 학력을 들먹이는 국회의원 바로 그분이 외고 폐지 운운하며 교육개혁의 소신을 가진 인물처럼 행동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추상적인 담론에서는 숨어 있는 진실이 추상 수준을 확 낮춘 구체적 사안 논쟁에서는 오히려 잘 드러나게 된다. 일종의 “무의식의 의식”쯤 된다고나 할까? 학교교육을 정치적인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순수한 무균상태로 보는 것이 얼마나 허황한 꿈인지를 해프닝 참가자들 스스로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다. 물리력에 의거하지 않고 객관성의 외관을 갖지만 궁극적으로는 체제유지 역할을 하는 형태, 예컨대 교육 같은 것을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고 부른다. 교과서 문제에서부터 전교조로 이어지는 공격은 권력을 장악한 이들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까지도 확실하게 재편하려는 시도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물리적 힘을 갖춘 실제 국가장치 그 자체에 관해서도 노골적인 장악욕구를 드러내는 것이 사법부에 대한 공격이다. 사실 여기에서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이 사법부의 권위를 무시하면 안 된다는 따위의 절차적 비판으로 맞서는 것은 그다지 위력적이지 못하다. 그것은 사법부의 판결이 객관적이고 무색무취하다거나 할 수 있음을 전제하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환상이라는 것은 굳이 1970년대의 “사법살인” 같은 어마어마한 일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예컨대 “서울은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수도로 자리잡고 있다”는 수준의 근거를 들이대던 행정수도 위헌판결 같은 것을 상기해보라!
그러므로 프라이버시 침해라든가 사법부의 판결을 존중하라는 것은 전혀 근본적인 비판이 되지 못한다. 국가는 지배계급의 집행위원회에 지나지 않는다는 마르크스의 언술은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를 실현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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