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천장 꾸밈새와 같은 형태의 말각조정(귀접이식) 천장인 이스파한 자미아사원의 마름모꼴 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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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35> ‘이란의 구텐베르크’ 가차투르 바르다페트
‘실크로드의 재발견’이란 거창한 구호를 내건 답사 길에서 내내 고민하는 것은 우리 역사나 문화와의 상관성을 찾아내는 일이다. 멀리 이란도 예외는 아니다. 어찌 보면 먼만큼 더 절박하고 의미가 크다. ‘이란의 진주’라는 이스파한에서도 그 몇 가지를 들춰냈다. 8월 10일(수요일) 찾은 도심의 이맘 광장은 원래 폴로 경기장이었다. 현장에는 지금도 경기장 남북 양쪽에 골대로 쓰던 대리석 기둥이 각각 두 개씩 남아있다. 밑둥 둘레는 약 2m, 높이는 2m 30cm쯤 되며, 골대 사이 거리는 10m 가량이다. 폴로는 페르시아어로 ‘초건’이라 한다. ‘공’이란 뜻이다. 원래 북방 유목민들이 말 타고 즐기던 경기다. 3~4세기께 사산조 시대부터 유행했으며, 비잔틴 시대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유럽에 전해졌다. 근세 영국의 경우 인도에 간 자국 군인들을 통해 알려졌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영국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상당히 인기있는 경기로 각광 받고 있다. 아르메니아 박물관 입구 동상 우뚝‘17세기 금속활자 인쇄기 발명’에 전율
‘세계 최초 고려에서 전파’ 입증 단서
문명교류사 속 한국 발견 뿌듯 동방의 중국 등 한자문명권에서는 격구(擊毬)란 이름으로 알려졌다. 당나라 현종이 타구(打毬), 즉 격구를 했다는 기록으로 미뤄 당 이전에 전해진 것으로 짐작된다. 한반도에는 중국을 거쳐 들어온 것으로 보이며, 무신들의 무예 놀이가 되면서 점차 퍼졌다. 고려 초 의종(1146~1170)은 격구의 명수로 실록에 기록되어 있고,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도 즐겼다고 한다. 후대 세종 또한 관람을 즐겼을 뿐 아니라, 보급용으로 격구장 30곳을 하사하기도 했다. 이즈음 격구를 격려하는 회례악(會禮樂)이란 타구악과 타구춤까지 생겼다. 그러나 문치주의를 표방한 조선 중기 이후 양반 사회에서는 점차 사라지고, 민간 놀이로만 계승되었다. 말을 타고 공을 막대기로 쳐 구문 밖에 내보내는 마상경기와 걸어다니며 공을 구멍 안에 넣는 보행경기로 갈라진 것이다. 〈경국대전〉을 보면, 경기장 길이는 400보, 골대 사이 거리는 5보로 원조인 이스파한의 경기장 규모(길이 510m)보다 작다. 경기 방법은 선수들이 중간 출마표에서 격구봉을 들고 대기하다 기녀가 노래하고 춤추면서 구장 한복판에 공을 던지면 경기를 시작한다. 이란의 폴로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경기, 악무의 결합이니 문화접변의 좋은 본보기다.
자얀데강 남쪽 줄파 지구의 아르메니아 교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반크성당의 내부에는 ‘최후의 심판’, ‘바벨탑’, ‘예수의 탄생’ 등 화려한 성화로 가득 차 있었는데 사진 촬영을 통제해 자세히 찍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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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 광장의 자미아사원 앞에 있는 폴로 경기장의 대리석 골대 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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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크성당 안의 아르메니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가차투르의 철제 인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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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입구에 있는 가차투르 바르다페트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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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속 가톨릭 불구 탁월한 무역상술로 ‘생존’
사파비왕조와 아르메니아인 이스파한의 명물 반크성당은 서구 가톨릭과 친연 관계인 아르메니아 정교회 예배당이다. 무엇보다 예배당 건립 시기가 사파비왕조 아바스 1세의 치세기인 17세기 초란 점이 이채롭다. 당시 이란 전역에서 다른 종파를 몰아내며 시아파 국가의 터전을 다졌던 아바스 1세가 정작 도읍에 이슬람과 적대관계인 북방 기독교도들을 끌어들여 성당까지 지어준 까닭은 무엇일까. 아바스 1세의 선심은 순전히 경제적 잇속에서 비롯된 것이다. 북방 카프카스고원에 살았던 아르메니아인들 가운데는 장사 기술에 능한 상인집단이 많았다. 생소하지만 그들은 중세기 이후 소그드인이나 사르트인에 필적하는 실크로드 국제무역의 귀재들이었다. 상업중시 정책을 폈던 아바스 1세는 사파비왕조를 중흥시키고 이스파한을 세계의 수도로 만들기 위해 국제 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과 물류 유통망의 확대를 갈망했다. 비단, 카펫으로 대표되는 자국산 특산물을 서구 기독교 세계에 팔고 중개 교역을 진척시키기 위해 서방과 전통적으로 친분관계였던 아르메니아 상인들을 무역 대리인 삼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스파한 교외에 유대인 게토 같은 별도의 아르메니아인 거주구역을 만들고, 상인조합까지 구성하도록 한 데는 이런 계산이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다른 종파를 탄압한 아바스1세였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의 기독신앙은 철저히 보장했다. 17~18세기 아르메니아 상인들의 거래규모는 영국의 대상인을 능가할 정도로 당대 중동의 동서방 교역에서 핵심적인 위상을 누렸다. 위험부담이 큰 중앙아시아, 소아시아 교역 활동에 능숙했던 그들은 자본 대부업이나 환어음 거래도 할 정도로 선진적인 거래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16세기 유럽에 아랍의 음료 커피를 보급시킨 주역이 아르메니아 상인이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아르메니아는 실크로드 교통의 남북축이 교차하는 요지에 있어 예부터 강대국의 틈 사이에 끼여 숱한 이산의 비극을 겪어왔다. 하지만 이런 역경이 세계 곳곳을 넘나들며 국제 상인으로서 진취적 기질을 닦는 밑바탕이 되기도 했다. 이슬람 사회에서 줄곧 냉대받았고, 터키인들한테 20세기초 대규모 학살 피해를 당한 아르메니아의 민족사는 유대인 수난사와 비슷한 부분이 많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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