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마스쿠스 구시가지 중심에 자리한 우마야드사원의 예배당 안에 세례 요한의 머리가 안치된 화려한 무덤을 관광객들과 신도들이 구경하고 있다.
|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37> 4천년 고도 다마스쿠스
흥망성쇠 거듭하며 융합문화 꽃피워
이슬람사원서 세례 요한 무덤도 ‘경배’
교황 바오로 2세 “위대한 종교공동체”
우마야드 사원의 입구. 앞 건물은 들어가기 전 손을 씻는 곳이 있다.
|
카시윤산 동남 기슭에 펼쳐진 ‘에메랄드 오아시스’라고 부르는 구타 오아시스에 자리잡은 다마스쿠스는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일찍이 많은 민족과 나라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기원전 2천년께 아람인들이 소왕국을 세운 이래 아시리아, 페르시아,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기원전 87년 아랍 셈족이 처음 도읍 삼아 나바티야 왕국을 세웠으나 얼마 못 가 로마제국의 내침으로 멸망한다. 뒤이어 비잔틴제국 영역에 편입되어 기원 전후 수백년 동안 그리스-로마, 기독교 문명에 훈육된다. 635년 아랍-이슬람군에게 정복되어 우마이야왕조 아랍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초기 이슬람 세계의 심장부로 떠오른다. 그러나 아바스왕조 시대에 수도가 바그다드로 옮겨가면서 지위는 떨어진다. 10세기 후반, 이집트에서 일어난 파티마왕조의 속지로 변했고, 400년 동안 십자군과 몽골군, 티무르군의 내침을 받아 파괴와 재건을 거듭했다. 16세기 초부터는 오스만제국의 속주로 있다가 1차 세계대전 뒤 프랑스의 식민도시로 전락했고, 1943년 시리아의 독립 수도가 되었다. ‘시대의 동반자’ ‘동방의 낙원’ 칭송
이처럼 다마스쿠스는 4천여년 동안 숱한 침탈 속에서도 폐허가 되어 터전을 잃은 적이 없었다. 그 속에서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비롯해 페르시아·헬레니즘 문화, 그리스-로마와 비잔틴-이슬람 문명, 프랑스 문명 등의 세례를 받으면서 여러 문명들을 융합시켜 특유의 복합 문화를 꽃피웠다. 그래서 흔히 ‘시대의 동반자’, ‘동방의 낙원’이라 부른다. 중세 이곳을 찾은 아랍 시인 누룻 딘은 이렇게 읊었다. “다마스쿠스, 행운이 가득한 우리네 집, 아득한 하늘가 너머의 그 축도/ 갈대가 춤추고 새들이 지저귀며 꽃이 만개하고 물이 출렁이는 곳/ 현현(顯現)한 온갖 산해진미, 훗훗한 거목의 녹음에 감싸였네/ 계곡마다 ‘모세의 샘’이 솟고 화원마다 푸르름 넘치네” 역사의 고비를 슬기롭게 헤쳐온 다마스쿠스가 ‘시대의 동반자’답게 오늘까지 빛내고 있는 미덕 중 하나가 기독교와 이슬람을 한 품에 아우른 문화다.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 사이의 해묵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현실에서 이 점은 더욱 중요하다. 그래서 이런 미덕을 잘 보여주는 몇 곳을 답사지로 잡았다.
사도 바울을 기리는 한 교회의 내부 벽에 걸려 있는, 바울이 박해를 피해 바구니를 타고 피신하는 장면을 그린 성화.
|
교회의 핍박하던 바울이 기독교로 개종해 전도사로 거듭난 아나니아교회에서 관광객들이 바울의 역정을 기록한 성화을 보고 있다.
|
’수크 하미디야’ 재래시장에서 한 상인이 음료수를 팔고 있다
|
‘무함마드 종통 찬탈’이 수니-시아파 분열의 씨앗 우마이야왕조의 100년 영화 다마스쿠스는 이슬람을 세계 제국화한 7~8세기 우마이야(옴미아드) 왕조와 한몸의 운명 공동체였다. 이미 실크로드의 교차로에 자리잡아 로마시대부터 번영했던 고도였지만 우마이야 왕조 시대 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서방 실크로드는 물론 당대 세계의 수도이자 중심이 되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원래 아라비아 메카에 모여살던 쿠라이슈 부족의 상인가문이 일으킨 일종의 쿠데타 정권이다. 시리아 태수 겸 장군이던 가문의 실력자 무아위야가 656~661년 이슬람 공동체에서 벌어진 왕위 찬탈전에 끼어들어 마호메트(무함마드)의 인척인 4대 칼리프 알리의 권좌를 빼앗고 자신이 왕위에 오른 것이다. 이 왕위 찬탈은 이른바 이슬람 역사에서 수니-시아파 종파의 분열을 알리는 서막이 되었다. 창시자 무함마드와 그의 일족으로 이어지는 칼리프의 신성한 종통을 가로챈 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정치적 인정 여부를 놓고 인정하자는 수니파와 거부해야 한다는 시아파 세력으로 무슬림이 분열한 것이다. 정통성 보완을 위해 정복사업과 상업활동에 매진한 우마이야 왕조는 서쪽으로는 스페인으로부터 북아프리카,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 북인도까지 아랍권에서 유례없는 세계 제국을 형성한다. 넓어진 교역 경제의 열매를 가장 마음껏 누린 도시는 당연히 도읍 다마스쿠스였다. 하지만 경제적 번영에도 불구하고 왕조에 대한 무슬림들의 증오와 의구심은 더욱 높아져갔다. 칼리프 자리를 거머쥔 무아위야 1세는 부족회의로 후계자를 정하는 관행을 무시하고 아들(야지드 1세)에게 왕위를 세습했고, 후대 왕들도 세습 정책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많은 아랍인들은 이 왕조를 아랍왕국으로만 부를 뿐 자신들의 역사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당대의 증오는 후대의 재앙으로 이어졌다. 1400~01년 정복군주 티무르는 무함마드의 사위 알리에게 불경하게 대했던 우마이야 왕조의 과거사를 심판한다는 구실로 다마스쿠스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대학살과 방화로 우마이야 모스크를 비롯한 도시 주요 시설이 모두 불타고, 직조공, 도공 등의 장인들은 사마르칸트로 끌려갔다. 다마스쿠스가 영원한 폐허가 될 뻔했던 이 참극은 이 도시를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었던 우마이야 왕조의 700여년 전 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750년 이란에서 무함마드의 일족인 아바스가가 정통성 회복을 기치로 반란을 일으키자 무너진다. 아바스 혁명왕조가 새 계획도시 바그다드로 도읍을 옮기면서 다마스쿠스의 오랜 영화도 끝장이 난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