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가리트 북쪽의 고대도시 알레포의 성. 고대 이집트 아유브·맘루크 왕조 시대(12~16세기)에 외침을 막기 위해 해발 150미터의 고지에 성채를 짓고 성 주위에 깊은 해자까지 파놓은 요새다.
|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40> 서양문자의 산실, 우가리트
오늘은 새벽 4시에 일어났다. 한두 곳 들러 목적지 알레포까지 갈 거리가 358㎞나 되고, 팔미라의 벨 신전 너머 떠오를 해돋이의 황홀경도 맛봐야 하기 때문이다. 바람대로 해돋이를 본 뒤 서쪽으로 두 시간쯤 달렸다. 150만이 사는 교육 도시 홈스에 도착했다. 길 양 옆에 키가 4~ 자란 초록빛 소나무와 올리브 나무가 숲을 이룬다. 도심 사피르 호텔 로비에서 잠시 쉬었다. 문득 50년 전 카이로 대학 유학 시절 같이 기숙하면서 다정히 지냈던 이곳 출신 학우 압바스가 떠올랐다. 그의 어머니는 이 고장 명물인 ‘할라위야’(당과)를 손수 만들어 보내면서 꼭 절반을 나눠 필자에게 전하라고 했었다. 몇 차례 감사 편지를 띄운 일이 떠오른다. 그 어머니는 살아 계실지. 압바스는 이 도시 어디메 있으련만. 우정이란, 본연의 마음씨이기에 세월, 국경도 뛰어넘는 법이다.
기원전 2천년 고대도시 1928년 발견
규모 워낙 커 80년간 4분의1 발굴
점토판문서에 쓰인 쐐기형 알파벳
20세기 성서고고학 최고 성과로 꼽혀
시외로 빠지니 큰 정유 공장들이 보인다. 안내원 말을 들으니, 시리아는 석유가 나긴 하지만, 양이 부족해 이라크에서 지중해로 뻗은 송유관으로 보충 받아 왔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송유관이 막혀 에너지 부족에 시달린다는 말이었다. 알라가 아랍 무슬림들에게 고루 하사한 부존 자원이 석유라는데, 알라도 감당 못할 ‘괴력’에 눌려 하사조차 못 받으니, 그 말은 한낱 허언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다시 달린 지 한시간여. 시리아의 최대 항구 도시 라타키야(아랍어론 라지끼야)를 지나 북쪽 15㎞에 있는 고도 우가리트에 이르렀다. 지금은 ‘샤므라 라어스’라고 하는 마을이다. 아랍어로 봄 여름에 피는 노란 ‘샤므라 꽃 피는 갑(곶)’이란 뜻이다. ‘우가리트’는 고대 아카디어와 바빌론어의 ‘우가루’(‘밭’, ‘땅’이란 뜻)에서 파생된 말이다. 지중해가 한눈에 내려다뵈는 해발 20m 언덕에 있는 이 고도는 면적이 30헥타르에 달하는 지중해 연안 유수의 고대 도시다. 1928년 봄, 마을의 농부가 밭 갈다 묻혀 있는 석판 하나를 우연히 발견했는데, 판을 들어올리자 밑에 부장품 가득한 묘실이 드러났다. 소문이 퍼지자 클로드 세페르를 비롯한 프랑스 고고학자들이 달려와 조사하면서 면모가 밝혀지게 되었다. 지금까지 거의 80년 동안 발굴했으나, 워낙 방대해 4분의 1밖에 하지 못한 형편이다. 발굴결과를 보면, 약간 경사진 이곳에는 기원전 7500~1200년 신석기시대, 석기-황동시대, 전기·중기·후기 청동기시대 등 5개 문화층이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기원전 12세기 돌연 사라진 왕국
우가리트는 샤비브 강과 달바 강 사이의 기름진 땅이다. 귤과 올리브 같은 과일이 풍성한 이 곳에는 기원전 7000년께부터 사람이 살았으며, 기원전 2000년께 도시국가 우가리트 왕국이 등장했다. 왕국은 키프로스, 이집트 등 주변 나라와의 교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기원전 14~13세기 전성기를 누리다 기원전 12세기 갑자기 모습을 감추는데, 지진이나 외래 침입에 따른 것으로 짐작된다. 후대에 왕궁과 신전, 무덤, 가옥, 수리시설, 각종 석제·청동제 유물, 인장 등과 이 모든 것들을 기록한 점토판 문서가 출토되어 그 면모를 윤곽이나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
세계 최초의 쐐기형 알파벳이 발견된 지중해 연안의 고대도시 우가리트의 유적 발굴 현장 한쪽에서 당시 포도주와 물을 담아 먹던 항아리가 보인다.
|
8월의 지중해성 기후는 혹독하다. 한달 남짓 기온이 훨씬 더 높은 열사 지대를 누비면서도 견뎠는데, 이곳의 고온다습(정오가 38도)한 날씨는 정말 지긋지긋하다. 몇 발자국만 떼어도 땀범벅이다. 야트막한 언덕길을 올라 서쪽으로 난 큰 대문에 들어섰다. 뒤죽박죽 폐허가 됐지만, 곳곳에 안내판이 세워져 어딘지 구분할 수 있다. 90개 방 달린 왕궁과 어전, 감시 구멍 달린 대기실, 대형 응접실과 연회장, 두개의 신전, 관공서, 장방형 지하묘실, 수로, 우물, 물이나 포도주를 넣었던 돌항아리 등 유적 유물들이 눈에 띈다. 대부분 유물들은 프랑스가 가져가고, 일부만 다마스쿠스와 알레포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가장 주목되는 유물은 우가리트 알파벳이다. 수천 점 점토판 문서의 기록수단인 이 문자는 쐐기(설형)문자를 쓴 세계 최초의 알파벳이다. 이 문자 발견에 따라 점토판 문서가 해독되고, 우가리트 역사가 베일을 벗었으며, 알파벳 문자사 연구의 단초가 열렸다. 그래서 고고학계는 47년 이스라엘 쿰란에서 발견된 가죽 두루마리 ‘사해사본’(기원전 2세기 유대교 경전)과 더불어 이 문자 발견을 20세기 가장 중요한 성서고고학 성과로 친다. 불원천리 이곳을 찾은 이유도 문자의 발견 현장을 확인하고, 오늘날까지 이어온 알파벳 전파사를 추적하려는 것이었다.
우가리트 알파벳은 응접실에 달린 작은방 몇 곳에서 나왔다고 한다. 3300여년 동안 인류 문명의 전승수단 구실을 한 알파벳 산실의 현장에 서는 순간, 실로 감개무량했다. 문자는 인간을 인간답게 한 최고 발명품이며, 지식을 특권층 독점에서 만민공유로 이끈 알파벳은 평등과 민주주의의 촉발제가 아니었는가. 점토판 문서란 진흙을 물에 개어 여러 크기의 판을 만들고, 굳기 전에 대나무 같은 예리한 도구로 글씨를 눌러 쓴 것이다. 햇볕에 말리거나 불에 구우면 돌 같이 단단해진다.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문명에서 최초로 기원전 3300년께 만들어진 문자는 바로 이 점토판에 쓴 쐐기문자로서 기원전 4세기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가 멸망할 때까지 3000여년 동안 쓰였다. 우가리트 점토판(길이 5.5㎝, 너비 1.3㎝) 문서는 기원전 13세기께 8개 언어의 5종 문자로 쓰였는데, 모두 쐐기문자의 범주에 속한다. 그중 토착 우가리트 문자는 다른 쐐기문자들과 달리 30개 자모체계(순서)를 갖춘 최초의 문자였다. 이렇게 체계화한 알파벳이 있었기에 그토록 많은 점토판에 기록할 수 있었다. 우가리트 알파벳은 왕국의 멸망과 더불어 일시 자취를 감췄지만, 얼마 뒤 복원 계승된다.
|
석묘에서 발견된 점토판 문서(가운데)에 새겨진 우가리트 알파벳(위)과 그 음가(아래).
|
기원전 5세기,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는 페니키아의 전설적 인물 카드모스에 의해 그리스로 알파벳이 전해졌다고 했다. 그런데 그 알파벳은 우연한 계기에 우가리트 알파벳을 계승한 페니키아 알파벳임이 밝혀졌다. 1922년 페니키아 옛 땅인 레바논 비블로스에서 모래 사태가 나는 통에 비블로스 왕가의 석관(베이루트 박물관 소장) 하나가 드러났는데, 이 석관의 벽이 페니키아 알파벳 명문이 새겨진 최초의 알파벳 비문으로 밝혀진 것이다.
페니키아 알파벳으로 맥 이어져
그 형태는 오늘날의 ‘ABCD…’꼴을 닮았으며, 문자 체계는 우가리트 알파벳과 대체로 일치한다. 이 문자는 해상 활동을 하던 페니키아인들을 통해 동서로 널리 전파되었는데, 서쪽으로는 그리스로 갔고, 그것이 다시 라틴어로 이어져 현대 서구의 알파벳으로 발전했다. 동쪽으로는 아람어를 거쳐 인도어와 아랍어, 히브리어 알파벳을 탄생시켰다. 그래서 우가리트는 알파벳의 산실이며, 그 문자를 알파벳의 조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유적지 앞 식당에서 지중해산 생선 튀김으로 푸짐한 점심을 먹은 뒤 곧장 북방 고도 알레포로 갔다. 하루 중 가장 뜨거운 오후 2시, 해발 700m쯤 되는 알라워 산 마루를 넘다가 차 에어컨이 엔진 과열로 그만 고장이 났다. 운전 기사가 물을 엔진에 끼얹자 한참만에 정상 가동한다. 사막에선 자주 있는 일이다. 오후 4시께, 알레포에 도착하자마자 알레포 국립박물관에 들렀다. 1만년 전 석기시대부터 13세기까지 유물들이 시대별로 전시되어 있다. 대부분 폴란드와 프랑스, 독일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것들이다. 특이한 것은 탈 할프관에 전시된 앗시리아 시대 사자 석조물들이다. 걸을 때와 서 있을 때 모습의 시각성을 부각하기 위해 다리 다섯 개를 단 이 사자상들은 예술성 높은 수작이었다. 이집트 아유브·맘루크 왕조 시대(12~16세기)에 외침을 막으려고 지은 성채도 둘러봤다.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높이 150m 고지에 5㎢의 면적을 차지한 성채 주위엔 깊은 해자까지 파놓았다. 사원과 신학교, 목욕탕과 창고터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곳곳에서 지중해 해상문명의 흔적을 찾아본 하루였다. 삼면이 바다인 한반도 해양 문명의 내일을 구상하며 시리아 답사일정을 마쳤다.
글 정수일 문명사연구가,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페니키아 상인 따라 지중해·아랍·히브리·인도로
실크로드와 알파벳알파벳은 ‘인류사를 바꾼 문자’란 헌사가 붙는다. 발음에 갈음하는 개별 글자를 조합해 온갖 뜻을 전달하는 표음문자 체계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이집트 상형문자나 수메르의 쐐기문자, 한자는 표의문자이므로 최소한 수백 수천개의 글자를 외워야 한다. 반면 알파벳은 20여자만으로도 의사소통이 가능해 지식과 문화의 빗장을 푸는 혁명을 가져왔다.
물론 알파벳이 상형문자를 빌려 형성되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기원을 둘러싼 논의는 지금도 분분하다. 이집트 시나이 반도의 세라빗 엘 카딤에서 발견된 기원전 1500년께의 시나이 문자가 새겨진 스핑크스가 모태라는 주장과 시리아 우가리트에서 발견된 기원전 13세기께의 점토판 문자를 기원으로 보는 견해가 그것이다. 이들 유물과 알파벳의 계통 관계가 명확히 규명된 것은 아니지만 문자수가 30개 안팎의 표음문자인 것이 확인되고 있어 어떤 갈래로든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우세하다.
알파벳의 원형을 만든 것은 고대 지중해 상권을 주름잡은 페니키아인들이다. 그들은 이집트, 수메르 상형문자들이 여러 나라와의 자유로운 소통이 필요한 상업 환경에 맞지 않아 표음화한 새 문자체계를 구상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시리아 비블로스 지역에서 나온 기원전 11세기께 아히람왕의 석관 비문이나 기원전 10세기께의 레바논 접시 등에서 틀잡힌 페니키아 알파벳의 원형이 발견되고 있다. 페니키아 알파벳은 기원전 11~18세기 그리스로 전파되면서 그리스 알파벳의 틀이 잡힌다. 모음을 많이 발음하는 그리스인들은 자음 일변도의 페니카아 알파벳에다 시리아 아람문자에서 따온 모음자를 덧붙여 기원전 5세기 자음 17글자, 모음 7글자의 알파벳 체계를 정립한다. 로마인들은 기원전 3세기께 이를 다시 19글자로 간소화한 라틴 알파벳을 만들었고, 이후 고트, 키릴 문자 등이 갈라졌다.
동방에서도 페니키아 알파벳은 기원전 8세기 시리아 아람문자와 유대인들이 지금도 쓰는 히브리 문자로 갈라졌다. 아람문자는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에서 채택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랍 문자의 원형이 되었고, 그 영향권에 있던 인도 카로슈티·브라흐미 문자의 모태 또한 형성했다. 브라흐미 문자는 현재 인도 힌디문자뿐 아니라 타이, 캄보디아 등 동남아 문자체계의 원형이기도 하다.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을 뺀 유라시아 대부분 지역에서 페니키아 알파벳은 광대한 문자생활권을 형성한 셈이다. 다기한 실크로드가 알파벳 분화를 촉진한 매개체가 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
<한겨레> 실크로드 답사단
취재 임종업 blitz@hani.co.kr,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김경호 jijae@hani.co.kr,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
|
|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