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6.07 21:40
수정 : 2006.06.09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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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연 성공회대 교수·정치학
① 헌정사적 의미 ② 진보개혁과 민심 ③ 새로운 길찾기 ④ 역사의 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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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1 지방선거와 진보개혁의 미래
진보의 자기 성찰과 혁신이 생생하고 풍부한 지식과 만나 대안적인 정치 리더십을 만들어낼 때, 좋은 사회에 대한 전략의 수립이 가능해진다.
5·31 지방선거는 우리 시대의 희망과 진보를 일구는 데 시사점을 던져준다. 먼저 선거의 득표 계산이 뿌린 대로 거두는 ‘긴 과정의 마지막 의식’이라고 할 때,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적극 수용한 채 민주개혁의 기대를 배반해 온 현 정권의 실정과 독선이 집권여당의 궤멸적 패배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그것은 자업자득이었다.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집권세력에 분노한 민심이 왜 한나라당의 고공상승으로 이어졌을까 하는 것이다. 단순 반사이익이라는 해석을 넘어 역사적 허무주의의 집단적 확산 징후로까지 읽히는 이 대목이야말로 진보의 냉엄한 자기성찰이 필요하다.
초록이 동색인 보수 공조와 상생의 정치가 사회적 양극화에 따른 빈부격차의 심화와 가중되는 경제적 궁핍화에 따른 희망 파괴의 주범인데도 왜 민심은 새로운 선택에 주저하면서 자기 파괴적인 선택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서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분노의 정서적 결을 치밀하게 읽어내지 못한, 그리하여 보편적인 희망의 언어나 잔잔한 여운을 주는 대안의 힘으로 대중들의 가슴속에 스며들지 못한 무기력하고 무능한 진보의 결과인 측면이 있다.
원내 진출 이후 민주노동당은 모든 걸 다 잘해야 한다는 ‘슈퍼맨 콤플렉스’의 덫에 걸려 선택과 집중에 실패했다. 또 이번 선거에서 근거 부재의 과도한 목표 설정은 접어두더라도 기성의 언어를 흉내낸 진보개혁 세력 대표주자 교체론과, 광신적 반공주의와 한 짝인 맹목적 애국주의의 동영상 홍보는 방향을 잃은 선거 전략과 기획의 부재를 상징한다. 그것은 상생하는 보수와의 차별화를 통한 영향력 확장 가능성을 스스로 닫은 것이자,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진보정당다움을 잃어버린 것이다.
사실 생존의 공포와 소외에 대한 두려움에 기반하여 지배질서를 재편하려는 신자유주의의 광풍은 다가올 미래에 대한 열정의 표출보다는 오히려 현재의 강퍅한 삶에 사람들을 속박시킨 채 불확실한 미래보다는 확실한 과거로의 회귀를 선택하게 한다. 이에 의식이 존재를 배반하게 하는 상황이 끊임없이 연출되고 시민사회의 보수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또 노동의 배제와 운동의 위기가 가속화하면서 진보에 대한 신뢰의 두터운 형성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진보의 정체성 다지기, 새로운 길 찾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하루하루를 힘겹게 사는 사람들에게 감동과 열정과 희망을 불어넣지 못하는 진보의 외침은 공허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풀어야 할 중요한 숙제가 산적해 있지만 특히 두 가지에 주목한다. 하나는 진보진영의 오랜 고질병이자 과거 운동의 잘못된 유산인 20세기형 낡은 정파구도의 전복을 통해 진보의 정체성을 재구성하고 지지의 사회적 기반을 확장하는 일이다. 정파 사이 파멸적 대결구도는 전체 진보진영을 수직적으로 분획시킨 내부 갈등의 핵심이자 대중적 신뢰의 확장을 가로막고 있는 질곡의 근원이다. 어떤 사상이나 노선이 생명력 있는 대안의 무기가 될 여지는,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유의미한 해석을 통해 각 시대가 제기하는 문제에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하느냐, 대중들의 삶에 깊고 넓게 밀착하여 집합적 열정과 호응을 불러일으키면서 참여를 독려해낼 수 있느냐 하는 능력에 달렸다. 이런 점에서 아직도 시대착오적인 미망에 사로잡혀 있는 정파들의 자기 성찰적 혁신이나 발전적 해소는 이르면 이를수록 좋다.
진보가 풀어야 할 다른 하나의 숙제는 ‘확신성의 딜레마’다. 과거의 시간과 경험을 기초로 현실을 해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수와는 달리, 잘못된 현실을 바꾸려는 진보의 눈은 필연적으로 미래에 두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있어야 할 유토피아’로서 새로운 미래를 ‘지금/여기서’ 구상하고 실천해야 하는 진보 쪽에 미래란 불확정적일 수밖에 없다. 불확실한 내일을 말하면서, 오랫동안 체화되어 온 일상의 환상과 거짓에서 벗어나기 위한 집합행동을 이끌어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이 딜레마를 해결해야 하는 기제로서 살아 숨쉬는 이념의 발전은 필수적이며, 좋은 정치 리더십의 창출은 그 실마리를 풀 수 있는 지름길이다.
도덕성의 우월적 지위나 깃발에 대한 박제화한 강조만으로는 실종된 대중적 신뢰를 회복할 수 없게 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진보의 자기 성찰과 혁신이 생생하고 풍부한 지식과 만나 대안적인 정치 리더십을 만들어낼 때, 좋은 사회란 어떤 사회이며, 그 사회는 어떻게 만들 수 있으며, 누가 함께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전략의 수립이 가능해진다. 또 그래야 수평적 소통과 연대에 바탕을 둔 새로운 실천의 전형을 발견하고 발명할 수 있다.
이처럼 사회에 뿌리내린 운동의 역동성을 되살려내면서 한국 사회의 진보진영이 설득력 있는 대안적 프로젝트의 조직가이자 ‘미덕과 실력을 갖춘 21세기형 혁명가’로 새롭게 거듭날 때, 비로소 ‘더 나은 세상, 또다른 세계’가 이룰 수 없는 환상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꿈이라는 믿음과 열정의 부활 속에서 대중들 스스로 파괴된 희망을 복원하는 주체로 나설 수 있게 될 것이다.
조현연 성공회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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