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6.14 20:53
수정 : 2006.06.14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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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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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6·15 선언 6돌을 맞는다. 한국 현대사 연구가 브루스 커밍스가 지적한 대로 한민족이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 최초의 사례”인 6·15 선언은 한반도의 전쟁위험을 막고 남북 사이에 화해협력의 길을 텄다.
그러나 일본의 신군국주의화, 중국의 신중화사상, 미국의 남북화해 비협조, 러시아의 에너지 자원 전략화 등은 하나같이 우리에게 위협이다. 주변 열강은 10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게 우리를 압박하는데, 우리는 두 쪽으로 갈라져 민족의 에너지를 내부에서 소진하고 있다. 6·15 선언 이후 남북관계가 부분적으로는 상당히 개선되고 있지만 큰줄기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북한의 지하자원 개발권이 잇따라 중국 기업에 넘어가고, 북한에 불상사가 발생할 때 북한을 합병하려는 의도가 ‘동북공정 프로젝트’의 본질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일본은 독도를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고 억지를 쓰면서 야욕을 보인다. 갈수록 강화되는 미국의 북한 고립화 정책과 이에 맞선 북한의 핵개발은 언제 한반도 운명의 재앙으로 번질지 모른다.
역사는 기회를 선용하지 않으면 보복한다고 했다. 서기 642년 겨울, 평양에서 신라 김춘추와 고구려 연개소문의 회담이 열렸다. 백제의 공격으로 40여 성을 잃은 신라는 실권자 김춘추를 북으로 보내 양국 사이 화해·협력을 논의케 했다. 연개소문은 쿠데타로 집권한 고구려의 새 권력자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역사상 첫 남북 영수회담은 결렬되고 신라는 당나라 군대를 불러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로부터 1300년이 지난 1948년 4월, 남쪽의 김구, 김규식과 북쪽의 김일성, 김두봉이 평양에서 4김 회담을 열고 외군철수·분단정권 수립 배격 등에 합의했지만 미국과 소련, 남북의 분단세력이 반대하여 남북 영수회담은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말았다. 첫번째 평양회담의 결렬로 한민족은 광대한 대륙영토를 잃고 반도국가로 전락하고, 두번째 평양회담의 실패로 분단과 동족상쟁의 전쟁을 겪게 되었다.
다시 그로부터 52년 뒤인 2000년 6월15일, 평양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다. 5개 항의 합의가 이루어지고 대결과 증오로 얼룩진 남북관계가 화해협력 체제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6·15 선언은 진행형이다. 과거 두 차례 남북 정상회담 실패의 결과를 안다면, 그리고 한반도 주변정세를 바로 인식한다면, 6·15 선언의 합의사항은 반드시 지켜나가야 한다. 외세의 작용에 놀아나 동족끼리 또 다른 전란이 일어나면 한민족은 구제불능의 위기에 처하게 될지 모른다.
친미 반북이나 반미 친북식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휴전선을 국경선으로 인식하는 분단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북한은 중국의 동북4성으로, 남한은 미국의 52번째 주로 편입되는 민족 멸망사가 현실화할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통일을 민족의 2대 사명으로 명시하고 있다. 과거 두 차례 실패한 남북 정상회담의 교훈을 살려 6·15 선언이 반드시 성공하고 그 합의사항이 실천되도록 남북 7천만 겨레의 노력이 요구된다. 이달 말에 다시 만나게 될 6·15 선언 두 주역의 민족사적인 헌신을 기대한다.
김삼웅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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