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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7.25 11:38 수정 : 2006.07.25 20:56

남부 레바논에서 소개된 사람들이 25일 프린세사 마리사호 선박편으로 키프로스 라르나카항에 도착하고 있다.(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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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당신과 가족이 레바논을 떠난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요. 지금 우리 집은 이스라엘 공군기의 저공비행에 박살날 듯 온통 흔들리고 있습니다. 부디 레바논을 위해 기도를….”

베이루트에서 친하게 지냈던 한 레바논 친구로부터 이메일이 도착했다. 그들의 무사함에 안도하면서, 용기를 잃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여름철이면 밤마다 불꽃놀이가 벌어질 레바논 하늘을 포탄의 섬광이 대신 밝히고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경기도 면적에 인구 4백만명의 작은 나라, 동서문명의 교차로에 위치하며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구가해온 레바논.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사후세계로 타고 갈 배를 만들기 위해, 이스라엘의 솔로몬왕은 성전을 짓기 위해 레바논의 백향목을 찾았다.

개방적 기질에 상술이 뛰어났던 조상 페니키아인들은 지중해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하며 융성한 교역을 자랑했고, 영어 알파벳의 모태가 된 페니키아 문자를 발명했다. 그러나 아시아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해 지중해 건너 유럽(서양)과, 몸이 붙은 아시아(동양) 사이에서 총체적인 정체성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고 지금도 겪고 있는 나라. 이슬람과 기독교를 망라한 18개의 종파가 공존하고 그 종파에 의한 권력배분이 이루어지며 중동에서 유일하게 기독교인 대통령이 존재하는 나라 레바논. 그래서 일단 레바논을 이해하면 제아무리 사정이 복잡한 나라라도 이해 못할 것이 없다는 얘기를 한다.

키프로스에 거주하는 레바논인들이 24일 키프로스의 수도 니코시아의 레바논 대사관 밖에서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격에 항의하는 집회에 참가하고 있다.(AP=연합뉴스)

레바논 사람들은 환경적으로는 다른 중동국가에선 꿈도 꿀 수 없는 푸른 산과 넉넉한 수자원, 게다가 겨울에는 눈까지 내리는 축복 속에 산다. 곳곳에 로마 유적지와 기독교 유적지가 흩어져 있다. 레바논에 산다는 건 매일매일이 새로운 발견의 연속이다. 온화한 날씨와 수려한 자연경관, 유구한 역사의 흔적, 그리고 재능있고 낙천적인 사람들의 기질 때문에 레바논은 오래 전부터 ‘중동의 진주’, ‘중동의 스위스’라 불리웠다.

그러나 레바논은 지정학적 위치로 늘 국제정치의 희생양이 되어왔다. 근세에 들어서만도 오토만 터어키의 지배, 프랑스의 신탁통치를 거쳐 1943년 어렵게 독립을 했지만 온전한 국가주권과 존엄을 지키기 어려웠다. 여러 차례의 중동전쟁과 15년에 걸친 내전, 이스라엘의 침공과 시리아의 영향까지 레바논 역사는 실로 파란만장하다. 레바논 인구가 400만명인 데 비해 조국을 떠나 해외에 거주하는 레바논인이 1600만명에 이른다는 사실은 험난한 역사를 보여주는 예다.

한 레바논 사람이 13일 이스라엘 헬기의 로컷 공격후 화염에 휩싸인 레바논 베이루트의 라피크 하리리 국제공항을 가리키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해 2월 발생한 하리리 전 총리 폭탄테러는 레바논인의 자유와 국가 존엄에 대한 열망을 분출시키는 기폭제가 됐다. 백향목이 그려진 국기가 단합을 상징하며 레바논 전역에 물결쳤다. 종교와 정파를 뛰어넘은 그들의 성숙한 시민정신에 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레바논은 또다시 내분으로 빠져들었다. 정치파벌들간 대화와 타협은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고 결국 오늘날과 같은 사태를 맞게 됐다. 희생은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 되었다. 스스로의 힘과 지혜, 단합이 없이는 국제관계에서 희생물이 될 수밖에 없는 냉엄한 현실을 통감하게 한다.

김영선/주일 대사관 공사(전 주레바논 대사)

레바논에서 친하게 지낸 베이루트 아메리카대학(AUB)의 교수가 최근 세계국제정치학회 참석차 일본을 찾았다. 그는 일본에서 레바논 사태 소식을 접했다. 공항과 항만이 모두 폐쇄되어 갈 길이 막막했지만, 그는 요르단 암만에서 시리아를 통해 육로로라도 레바논으로 돌아가겠다며 길을 떠났다. 그를 떠나보내면서, 도착하면 이메일로 무사함을 알려달라는 당부 밖에 할 수 없었다.

김영선/주일 대사관 공사(전 주레바논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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