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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7.26 18:19 수정 : 2006.07.26 18:19

최영태 /전남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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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미사일 발사 이후 우리 사회에 북한의 배신과 햇볕정책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다. 남한의 식량과 비료에 북한이 핵과 미사일로 보복했다는 이유다. 이 비판에는 보수야당과 언론은 물론, 그동안 햇볕정책을 지지했던 일부 원로인사들까지 가세하고 있다. 5·31 지방선거에서 나타난 극단적인 쏠림현상을 상기할 때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닌 것 같다.

오늘의 이 불행한 사태의 일차적 원인 제공자는 물론 북한 지도부다. 식량 등 기본 생필품조차 자력으로 해결하지 못하면서 은밀히 핵 개발을 시도하고 미사일을 발사하는 그들을 이해해 줄 남한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햇볕정책의 폐기와 대북 제재도 결코 좋은 해결책은 될 수 없다. 잘 알다시피 1961년부터 92년까지 남한을 통치했던 군사정권들은 30여년 일관되게 반공 제일주의 및 대북 봉쇄정책을 펼쳤지만, 북한이 80년대에 남한 전체를 사정거리로 하는 미사일 개발을 제지하지 못했고 무장 공작원 침투도 막지 못했다. 군사정권들은 오랜 집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남한 우위의 군사력마저도 구축하지 못했다. 대북 대결 및 봉쇄정책은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는, 이미 실패한 정책이다.

여기서 잠시 우리와 비슷한 분단경험을 지닌 독일의 통일사로 눈을 돌려 보자.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는 69년 집권하여 동독을 포함한 동유럽 공산국들과 적극적인 화해·공존 정책, 이른바 동방정책을 추진했다. 이 때문에 그는 야당인 기민당과 보수 언론으로부터 큰 저항과 비난을 받았으며, 불신임 투표에서 불과 두 표 차이로 위기를 벗어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브란트를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동독 지도부의 배신이었다. 동독은 동방정책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보면서 다른 한편으로 서독 총리실에 스파이를 침투시켰다. 동독 스파이 사건이 밝혀지면서 브란트는 결국 총리직을 사임해야 했으며, 동방정책은 한동안 조소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동독의 배신에 분노하면서도 서독인들은 곧바로 냉정을 되찾았다. 브란트의 뒤를 이은 사민당의 슈미트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82년 정권을 인수한 기민당의 콜 정부마저 동방정책의 기조를 그대로 이어갔다. 90년 동서독이 통일되었을 때 독일 국민들과 역사가들은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있었기에 평화적인 통일이 가능했다고 후하게 평가했고, 불명예스럽게 총리직을 떠난 브란트도 화려하게 부활했다.

푸아드 시니오라 레바논 총리는 최근 이스라엘과 헤즈볼라 사이 불과 며칠 동안의 전투가 있은 뒤 “레바논 경제가 50년 전으로 후퇴하고 있다”고 한탄했다. 미·일의 대북 봉쇄론과 남한에서 거세게 일고 있는 배신론 및 북한 제재론은 경우에 따라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공존을 깨뜨리는 치명적 화를 부를 수 있다. 훗날 북한 주민들로부터 ‘우리(북한 주민)가 굶주리고 있었을 때 당신들은 무슨 도움을 주었느냐’고 물었을 때, 우리는 ‘도와주고 싶었지만 이러저런 이유 때문에 계속 도울 수가 없었다’고 구차하게 변명하기보다는, ‘이러저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도왔다’고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동방정책이 그랬던 것처럼 남북화해와 평화공존 정책 역시 길게 보고 판단해야 할 사안이다.

최영태 /전남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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