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7.27 21:02
수정 : 2006.07.27 21:02
|
박연철 /법무법인 정평 변호사
|
기고
법적 절차에 의하여 실체적 진실을 밝힌다는 것이 때로는 얼마나 무모하고 값없는 일인지 몸서리치게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1991년 5월 8일에 발생한 김기설씨 유서대필사건에 대하여도 똑같은 위험성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유서의 필적이 자신의 것인지 아닌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강기훈씨로서는 법정에서의 치열하고 복잡한 공방이 하나의 휴지조각처럼 가벼운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필적이 김기설씨의 것이라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증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그 재판은 사법적인 횡포였을 것입니다. 강기훈이 유서를 대필하지도 않았는데 그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것이라면 우리나라의 검찰과 법원은 그 근원에 있어서 무의미한 행동을 마음대로 구사하는 광대나 다름없다 할 것입니다.
강기훈씨의 변호인중의 하나로서, 강기훈을 수사하고 기소한 검찰의 부장이었던 강신욱님에게 이 지면에서 무엇이 진실이라고 강변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이제 공직을 벗어나셨고, 가장 최근의 공직이 대법관이셨기에, 진실한 사실 앞에서 어느 한편으로 편향됨이 없이 유서대필의 진실을 구명하는데 동참하여 주실 것을 권면하기 위하여 이런 글을 공개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진실에 목이 마릅니다. 그래서 그 당시의 수사기록 및 재판기록집을 가끔 꺼내어 만지작거려 보기도 합니다. 강기훈씨 본인에게나, 김기설씨 주변인에게는 그토록 명확한 진상이 왜 우리 법조인에게는 이토록 어두컴컴한지 개탄하기도 합니다.
지금 과거사위원회의 조사대상에 유서대필사건도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하여는 강신욱님을 포함한 여러 수사검사들로부터 당시의 수사 및 기소결정과정을 청취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경우에 강신욱님께서 어떻게 하실는지... 여늬 법조인처럼 자신이 그 당시 판단하고 결정한 대로 법원에서 유죄판결을 선고받았는데 더 이상 할 말이 무엇이겠느냐, 그리고, 나는 그 당시의 결정이 옳았다고 지금도 확신한다든지 하는 말로 전혀 응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출석요구에나 방문조사는 어림없다고 화를 낼 수도 있겠지요. 사실 그런 방식은 정말 유쾌하지는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탁을 드리는 것인데, 이제부터라도 그 기록을 다시 한번 살펴보시고, 시민사회에서 묻는 여러가지 질문에 스스로 답을 모색하여 보는 것입니다. 그 당시는 공안과 질서가 중요하였고, 단기적인 수사의 성과가 반드시 요구되는 때였지만, 지금은, 오로지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가를 확인하기 위한 반성적 작업을 시도하여 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과거사위원회에서 조사를 나가기 전에 이미 그에 대한 답변을 마련하고, 그것이 강신욱님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김기설의 어렸을 적 글씨, 그 친구에게 쓴 편지글씨와 전국연합에서 활동하면서 쓴 필체가 서로 다른 모양이라는 것은 같이 느낍니다. 그런데, 유서글씨와 강기훈의 글씨가 같다고 하는 데에는 격심한 마음의 균열을 막을 수 없습니다. 누가 이 두 글씨를 같다고 할 수 있을까. 강신욱님을 비롯한 수사검사들이 주관적으로 판단하기에도 같은 글씨였을까. 그때 강기훈을 지목하여 일단 구속하기는 하였지만, 강기훈이 아닌 다른 대필자를 찾아 보려고 애쓰지 않았던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김형영 실장이 유서글씨와 강기훈의 글씨가 같은 필적이라고 감정을 하여 왔을 때 수사검사의 입장에서 그것이 신뢰할만하다고 여겼을까. 혹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검찰의 유형,무형의 주문에 맞추어 허위감정을 해 왔으리라는 의문은 가져 보지 않았을까. 결국 국과수의 감정을 유일한 증거로 하여 이와 상반되는 다른 3-40종의 증거자료들을 배척하고, 강기훈씨와 운동권 사람들 모두를 광범위하게 증거를 조작한 공범으로 지목하면서 극악무도한 인자들로 몰아 세울 때, 지성과 양심이 있는 한 개인으로서 가능한 업무수행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의문에 사로잡힙니다.
대법관으로 퇴임하셨으니 이제야말로 인생의 전반을 돌아보는 휴식과 성찰의 시간이 다가올지 모릅니다. 그리고, 유서대필사건은 회상의 주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한 인간의 진실과 양심에 관한 문제라면, 제가 알고 있는 초월적인 존재는, 그를 한나라의 대법관으로 기억하기보다는, 진실과 양심에 충실하였는지 여부를 가지고 대면할 것입니다.
강신욱 전 대법관님께서 유서대필사건의 진실을 밝히는데 동참하여 주실 것을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이런 부탁을 이토록 공개적이고 야단스럽게 할 필요가 있을까도 생각하여 보았지만, 실체적 진실은, 그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겸허하게 진실의 광장으로 나와 증언함으로써만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으로 감히 청하게 되었습니다.
박연철 /법무법인 정평 변호사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