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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8.01 19:28 수정 : 2006.08.01 19:28

변지원/이화여대 인문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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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텔레비전 방송사의 여성 아나운서가 미인대회에 참가한 것을 두고 말이 많다. 이 논쟁의 핵심은 사실 ‘품위-선정성’이라든가 ‘표현의 자유’에 있지 않다. 핵심은 오히려 ‘언어’에 있다.

아나운서들은 이 시대 그 누구도 현실 생활에서 사용하지 않는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이다. 현실 생활의 언어 속에는 여러 가지 방언도 섞여 있으며, 규범에서 벗어나는 단어나 발음들도 자유자재로 사용된다. 그래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막상 현실 생활에서 아무리 재미있던 이야기도 글로 옮겨 보면, 어색하기 그지없다. 왜냐하면 현실은 입말의 세계인데, 이것이 글자로 정리되는 글말의 세계로 옮겨지면 그 차이점이 어색할 정도로까지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에나 바름(正)-속됨(俗)의 구분이 있는데, 글말의 세계가 ‘정’을 담당한다면, 입말의 세계는 ‘속’을 담당한다. 연설문이라든가 보도문 등은 ‘정’을 담당하는 대표적 보기다. 같은 공중파라 하더라도, 오락 프로그램들은 ‘속’의 세계를 넘나들며 입말 속에 담겨 있는 달콤 쌉쌀함을 찾아 전달하는 데 그 매력이 있다. 그래서 뉴스와 개그는 그 영역도 다르고, 전달 언어 역시 사뭇 다르다. 글말로 되어 있는 연설문이나 보도문 등도 음성 언어로 전달된다. 그렇지만, 입으로 말해진다 하여 이런 문장들이 우리가 평소에 쓰는 어투나 발음으로 전달되어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이들은 ‘정’의 세계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나운서는 이처럼 ‘정’의 세계를 맡아서 글말을 전달하는 전문 인력이다. 한국의 아나운서가 전달하는 것은 한국의 언어이며, 이것은 이들이 아니고서는 결코 제대로 발성될 기회가 없을 한국어 글말의 음운 체계다. 만약 아나운서들이 없다면, 한국어 글말의 음운 체계는 교과서 속에서 죽어 있는 글자 나부랭이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아나운서라는 직업은 부단한 노력을 요구한다.

아나운서의 기본 조건은 모국어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과 연습이지, 흔히 착각하듯 빼어난 외모나 멋진 배경이 아닐 것이다. 아나운서가 청취자들에게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의사가 환자에게, 교사가 학생에게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느 나라나 상황은 마찬가지다. 우리가 한국의 아나운서에게 만약 남다른 것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시대의 변화를 인정하라는 주장도 그 자체로 영 수긍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다면 그 이유는 바로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문제가 되고 있는 미인대회가 ‘정’의 세계를 대표하는지, 아니면 ‘속’의 세계를 대표하는지는 누가 보더라도 명약관화하다. 한국어의 ‘정’의 세계를 수호해야 할 인물이 굳이 ‘속’의 세계로 뛰어들려고 한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불안해지는 것이다. 강대국들 틈에서 겨우 7000만명의 사용 인구를 갖고 있는 한국어를 사용하는 한 사람으로서(중국어 사용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계산해 보시라!), 영어 공용어다 중국어 열풍이다 하며 갈팡질팡하도록 만드는 이런 중심 없는 언어 세계에 사는 한 사람으로서, 우리는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진정한 우리글을 가져본 지 이제 겨우 500년이 좀 지났다. 우리글을 제대로 소리내어 주어야 할 사람들에게 한국 사람으로서 욕심을 좀 부리고자 한다면, 이것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시대 역행적 사고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변지원/이화여대 인문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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