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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8.14 18:35 수정 : 2006.08.14 18:35

안병욱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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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차례의 광복절을 맞이한다. 해마다 이때면 식민지 침략의 야만성을 들어 일본을 비판하고 반성을 촉구한다. 광복절이 닥치면 평소 속으로 삭여왔던 감정을 더는 참아내지 못하고 토해내는 것이다. 이는 어느 순간부터 관습으로 굳어진 연례행사처럼 되었다. 물론 일제 침략이 야기한 폐해와 희생을 두고서는 백번이고 천번이고 되새김질해도 모자란다. 더욱이 갈수록 뻔뻔스러운 일본의 태도를 보면서 느끼게 되는 분통 터지는 감정이야 어떤 표현으로도 이루 다 형용할 수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일본 태도를 탓하면서 쳇바퀴를 돌고 있는 가운데 의도와는 달리 불행한 20세기 역사의 포로가 되는 셈이다. 곧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적 가치를 팽개치면서 단지 대립적 경쟁논리에 매몰되어 미래를 향한 더 큰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이런 의식구조는 철지난 냉전시대의 적대적 갈등구조와 짝을 이루면서 21세기에도 지난 100년처럼 또다시 우리 사회를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웃나라는 고사하고 분단된 국가의 통일문제 또한 뒷전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이미 인류사는 새로운 좌표를 가지고 성큼성큼 저만치 앞서 가는데도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감수성이 예민한 새로운 세대의 광복절은 다르다. 지난해 한·일 ‘피스 앤 그린 보트’ 배 안에서의 풍경은 동아시아의 미래를 기대하고도 남는 모습이었다. 대부분이 젊은 세대였던 한국과 일본인 600명이 함께 기념한 광복절은 작지만 꿈이 있고 요란하지 않지만 멀리 울리는 새로운 잔치였다. 두 나라의 청년들은 환경재단이 시험 삼아 띄운 배에 동승하는 순간 동료이고 친구이고 한패가 되어 이미 아무런 간격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한순간에 기성세대나 위정자들의 시대착오적인 인습을 몸으로 뛰어넘었다. 언어가 다른 것도 서로의 친밀한 의사를 소통하는 데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바닷길을 따라 이어진 공동체 탐험에서 동아시아 청년들의 미래를 발견한 것이다. 다만 필자와 같은 기성세대들만이 멀뚱한 표정으로 엉거주춤한 채 흐름에서 밀려나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한국과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 세 나라는 적어도 2천년이 넘는 동안 선린우호 관계를 지속해 왔다. 지구상의 어느 지역보다 평화롭게 서로 문명을 교환하면서 이른바 상생 관계를 유지해 온 것이다. 더러 치렀던 전쟁은, 예컨대 유럽 각국이 역사 이래로 끊임없이 침략과 살상의 전쟁을 반복해 온 것에 견준다면 크게 문제삼을 일이 못 되고, 더욱이 오늘날 유럽은 이웃과 손을 잡고 울타리가 없는 열린 세상을 창조해가고 있다. 따라서 지난 세기 일본의 침략으로 비롯된 적대와 갈등 관계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한때의 불행으로 치부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근세에 만들어진 감정의 골은 긴 역사를 통해 축적해 온 내적인 친밀감을 가지고 충분히 메워 낼 수 있는 것이다. 이른바 한류에서 드러나듯 우리는 그런 가능성의 사례를 대중들의 문화 소통을 통해 새삼 확인하고 있다. 오랜 문명 공동체적인 정서가 면면히 흐르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변화에 어두운 시대착오와 기득권에 집착한 수구보수가 여전히 갈등을 연장시키고 있다. 그동안 일본이나 한국의 위정자들은 목전의 야욕을 위해 갈등과 불화를 지피고 수시로 감정을 자극해 긴장을 조성해 오고 있다. 이런 기성세대의 천박한 역사의식으로 미래 세대의 세상을 오염시켜서는 안 된다. 이제는 광복절이 젊은이들이 미래를 꿈꿀 수 있는 한마당이 되도록 해야 한다.

안병욱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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