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9.22 20:50
수정 : 2006.09.22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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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병운 홍익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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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용훈 대법원장이 “검사들이 밀실에서 받은 조서가 법정에서의 진술보다 우위에 설 수 없다”며 “검찰의 수사기록을 던져버려라”고까지 했다고 한다. 또 같은 자리에서 “변호사들이 만든 서류는 사람을 속이려고 말로 장난치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이런 발언을 두고 변협과 검찰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의 ‘법조 3륜’ 밀월관계에서 국민들은 철저히 외면된 가운데 전관예우와 무전유죄 등 부정적인 결과들이 양산되어 왔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대법원장의 발언은 약간 표현상의 문제는 있으나 법정에서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기 어려운 현 사법구조의 문제점을 자인하는 발언이다. 검찰에 대한 발언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증거로 인정될 수 있는 ‘전문증거’인 검찰조서에 의한 예단 배제와 공판중심주의를 강조한 것이다. 변호사에 대한 발언 역시 진실규명 의무를 등한시한 그동안의 관행과 쉽게 고쳐지지 않는 병합심리 방식의 병폐를 지적한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의 우리나라 재판에서는 변호사의 ‘법리와 논리의 우위’가 필요 없었다. 다시 말해 그 변호사가 그 변호사였다. 심한 경우에는 사무장이 작성한 준비서면을 들고 와서 법정에서 잠깐 보거나, 심지어는 “준비서면대로 진술한다”라고 하는 변호사들도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변론기일의 연기가 빈번하고 심리도 한두 달 간격으로 열리다 보니 재판은 사실상 ‘서면화’되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능한 변호사는 법조계에 인맥이 두터운 사람일 수밖에 없다. 어떤 경우는 마당발 브로커가 변호사보다 더 유능하게 보이고 선호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법원장이 수장인 법원이 안고 있는 문제도 심각하긴 마찬가지다. 사법부 독립이라는 미명 아래 구축된 ‘사법 성채’의 밀실에서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물론 독재정권 아래에서 정치세력으로부터의 사법부 독립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지만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오늘날은 사정이 다르다. 비교적 학구적이던 한 판사의 부적절한 처신이나, “사회적 유력인사의 범죄는 구속을 원칙으로 한다”는 내규를 스스로 만들어 놓고도 정작 고등법원 부장판사의 구속에 대해서는 조목조목 따지는 동료 판사의 태도, 계좌추적을 위한 영장발부에서 판사 부인과 검사 부인의 차별 등은 현재의 사법 밀실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판사를 국민이 선거로 뽑고, 국민 중 무작위 선정된 배심원이 실질적인 재판을 담당하는 미국의 사법제도는 제대로 된 민주국가에서의 공권력에 대한 근원적이고 철저한 불신에 근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법원은 사법개혁을 한다고 하면서도 무늬만 배심재판인 제도를 도입하여 국민을 들러리로 세우려 하고 있다. 법원이 국민들에게 “법은 우리만 아니 너희들은 빠져라”고 한다면 국민들은 그들에게 “우리(국민)가 주인인 국가에서 너희들은 누군데 우리를 심판한다는 것인가?”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대법원장은 프랑스 시민혁명 때 첫번째로 타도의 대상이 되었던 당시 봉건적·귀족적 사법부의 모습과 현재 우리의 것을 비교해 보아야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국민이 외면되고 있는 점에서는 두 제도는 서로 같다. 이제는 실질적 재판권을 국민에게 돌려주어 사법부에서도 민주주의, 즉 국민주권주의가 실현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류병운 홍익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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