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11.22 18:52
수정 : 2006.11.22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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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명 /서울대 사범대 지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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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요즘 한국에 논술 광풍이 불고 있다. 광풍이라고 한자어로 말하면 좀 점잖게 들리는 듯하지만, 결국 ‘미친 바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광풍 속에서 누가 제정신을 잃고 있는지 한번 따져보자. 어린 나이에 논술 준비를 하는 초등학생? 논술 바람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학원? 자녀를 학원으로 내모는 학부모? 아니다. 그들은 너무나 ‘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다. 논술이 중요하다는 마당에 일찍부터 준비를 하는 어린이는 그 나름대로 현명한 학생이다. 논술교육이 사업이 될 수 있겠다는 판단을 하고 논술 학원을 열어 사업을 하는 사람도 극히 정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빨리 논술 시장의 크기를 읽고 돈을 벌겠다고 나서는 사업가를 보고 누가 ‘비정상’이라고 하겠는가? 자녀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학원교육에 기대를 걸어보는 학부모도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논술 광풍 속에서 ‘바보짓’을 하는 이는 누구인가? 논술 입학시험을 채택한 한국의 대학들이 그 주인공이다. 논술 광풍을 만들어낸 이가 그들이며, 그 바람에 가장 ‘비정상적’인 일에 에너지를 소모함으로써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것도 그들이다. 이해가 잘 안 된다면 우선 세계 어느 명문대학에서 한국의 대학처럼 논술고사를 직접 시행하는 대학이 있는지 한번 살펴보라. 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의 선진국에서는 논술시험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지만, 대학이 입학생을 선발하려고 자체적으로 논술시험을 시행하지는 않는다.
세계의 어느 대학인들 우수한 신입생을 뽑는 일에 관심이 없겠는가? 하지만 지원자를 한날한시에 모이게 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 하는 대학은 없다. 왜 그럴까? 지원자의 실력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가 이미 많이 있으므로 그것을 활용하는 것이 간편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다른 자료는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대학이 자체적으로 ‘저울’을 개발하여 지원자의 실력을 ‘천분의 일’ 차이 정도로 정밀하게 측정하여 합격자를 선발하려고 하는 일이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논술시험을 치르는 대학들은 변별력을 갖는 믿을 만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출제와 채점에 투자하는 비용과 인력의 절반으로 연구팀을 구성하여 선발방법을 찾아보라. 그런 묘안 하나 못 찾아내면서 어찌 세계적인 대학으로 발전하겠다고 큰소리 치겠는가?
지금 세계의 대학들은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 그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 길은 우수한 졸업생을 길러내는 일이다. 신입생 잘 뽑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들을 잘 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서울대를 한번 생각해 보자. 입학생의 수준은 세계 어느 대학 입학생보다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졸업생의 경쟁력은 과연 세계 몇 위나 될까? 다른 나라와 비교할 것도 없이 서울대 졸업생을 상대로 다시 논술시험을 쳐보면 어떨까? 입학 때보다 창의적 사고력, 근거를 대면서 논리적으로 자기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능력 등이 얼마나 높아졌을까?
정말이지 한국이 신경써야 하는 것은 중등학교 교육보다 대학교육이다. 제발 이제 중고등학교 교육 문제를 놓고 난리를 떠는 일 좀 그만 하자. 한국의 어른들이여, 제발 애들 좀 그만 괴롭히자. 논술시험 치는 대학들이여! 학생들 대학 들어오기 전에 진을 다 빼게 하는 일 좀 하지 말고, 친절한 금자씨가 한 말처럼 “너나 잘 하세요.”
류재명 /서울대 사범대 지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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