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12.13 18:58
수정 : 2006.12.13 18:58
|
곽재성/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
|
기고
독재자 피노체트가 숨진 뒤 칠레에는 축제가 한창이라고 한다. 한심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남의 나라 일에 굳이 이런 자극적인 수사를 쓰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가 집권했던 1973년부터 90년까지 공식적으로 3197명이 죽임을 당했고, 수만 명이 고국을 떠나야 했다. 아직까지 행방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도 1천 명이 넘는다. 그럼에도 독재자 피노체트는 퇴임 뒤 16년이 지나도록 법정에 서지 않았다. 칠레의 경우 90년에 문민정부가 들어서자마자 ‘과거청산을 위한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빠르게 설치하여 과거청산 작업을 시도했다. 그러나 군 최고 통수권자로 자리를 옮긴 피노체트의 영향력이 여전히 막강할 때라 제대로 된 진실 규명이나 관련자 처벌이 용이하지 않았다.
그나마 피노체트에 대한 법적 단죄가 시도된 것은 98년 신병치료차 영국을 방문했다가 스페인 법원의 기소로 체포돼 런던에서 가택연금 되면서부터다. 영국 정부는 피노체트의 죄는 인정했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재판을 받을 수 없다며 재판을 종결시키고 1년 6개월 뒤 그를 칠레로 돌려보냈다. 이를 계기로 칠레에서는 그에 대한 사법처리 움직임이 겨우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피노체트는 건강상의 이유로 번번이 법원의 소환을 피했고, 상급법원은 주요 혐의에 대해 기각결정을 내림으로써 과거청산 움직임은 지지부진해졌다.
칠레는 99년부터 무려 7년 동안이나 피노체트를 법정에 세울 충분한 기회가 있었으나 결국 실패했고, 그의 죽음으로 제대로 된 과거 청산의 기회를 잃고 말았다. 그런데 축제라니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피노체트가 죽었기 때문에 죄값을 치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더욱이 2004년 이후 피노체트가 통치기간 중 챙긴 2700만 달러의 국외 은닉자산이 드러나면서 ‘독재자지만 청렴했다’는 지지자들의 옹호론이 타격을 입은 상태에서 피노체트가 법의 심판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납득하기 어렵다.
피노체트의 죽음이 안타까운 이유는, “(법적인 처벌은 거부하며) 정치적인 책임이 있다”는 한마디 외에는 어떤 반성이나 사죄도 없었던 그를 그냥 떠나보냈기에 후일 그에 대한 평가가 왜곡될 가능성이 커졌다는 점 때문이다. 무엇보다 오늘날 칠레 경제가 안정을 구가하는 공적이 인정되는 상황에서 그를 법정에 세운 사진 한 장 기억하지 못하게 될 후손들은 피노체트를 경제번영의 기틀을 쌓은 단순한 독재자로 기억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중남미의 급격한 정치변동은 왜곡된 과거의 유산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례가 많다. 쿠바 카스트로의 장기집권은 50년대 바티스타의 독재가 길을 열어준 것이고, 차베스의 급진적인 개혁과 과격한 언사의 배경에는 장장 40년간 석유이익을 독점하며 부정부패를 일삼았던 베네수엘라 지배층의 전횡이 자리잡고 있다.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가 무리할 정도로 자원 국유화나 토지 분배를 추진하는 데에는 오랫동안 극소수 백인 지배층의 독재와 부패에 억눌렸던 인디오들의 한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에게도 군 의문사 규명작업, 전직 대통령 은닉재산 환수작업 등 짚고 넘어가야 할 과거청산 작업이 산적해 있다. 이 사건들이 영원한 미궁 속으로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고 나서 용서와 화해를 논할 일이다. 오늘을 똑바로 사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과거를 기억하는 일이다. 그것이 바로 피노체트의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곽재성/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