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덕수/법학박사·앰네스티 법률가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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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이 집행된 지 32년 만에 사형수 8명의 재심을 맡았던 서울중앙지법 형사23부가 무죄를 선고했다. 정치권에서도 여야 없이 모두 환영하였다. 내란예비음모 범죄가 ‘몽둥이와 물고문, 전기고문 등’으로 인한 허위자백이었음이 밝혀지고, 검찰 등 수사기관 조서의 증거능력이 부정되었다. 유신반대 대학생 시위가 격렬해지자 박정희 대통령이 1974년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하면서 정치적 목적으로 사건이 조작되었고, 정치권력의 요구와 입맛에 맞추어 판결하던 당시의 사법부는 이듬해 4월 사형 8명, 무기징역 8명 등의 중형을 확정지었다. 대법원 판결선고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하여 ‘사법 살인’이 행해졌고, 스위스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기록했다. 권위주의 시대의 일이라지만, 고문과 사형제도의 희생양이 된 이들 8명과 그 유족들에게 우리 사회는 어떻게 보상해야 할 것인가. 형사보상 제도와 국가배상 등 개별적인 보상이 있지만, 그 이상의 사회적 차원의 속죄와 보상이 반드시 따라야 하지 않을까. 사형제도 존폐에 대한 국민적 결단과 공감대 형성이 시급하다. 이 판결 선고가 나기 사흘 전에도 서울대 법대 서암홀에서는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한국지부가 주최한 ‘사형폐지 열린 토론회’가 있었고, 작가 공지영의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과 이를 바탕으로 한 영화가 국민 정서에 불을 지르고 있다. 이번 ‘제도 살인’에 대한 반성으로서, 우리 사회가 국회 법사위에서 잠자고 있는 사형폐지 특별법안의 조속한 통과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국회의원 재적 반수가 훨씬 넘는 175명이 발의한 법률안(2004년 12월9일)이 제대로 심의조차 되지 않고 있는 자가당착 현실은 시민사회의 무관심 때문이다. 유영철 등 엽기적 살인사건이 터지기만 하면 곧잘 우리는 극형으로 ‘정의실현의 통쾌감’을 느끼는 습성에 길들여져 있다. 세계 118개 나라가 사형을 폐지했다. 사형제 존치 국가의 2배에 가깝다. 유럽연합(EU)에 가입하려면 먼저 사형제도를 폐지해야 한다. 사형제가 없는 유럽사회가 사형제를 존치한 미국(12개주와 워싱턴디시에서만 폐지됨)보다 더 안정과 질서를 누리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형사정책 전문가 800명에게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84%가 사형제도에 살인범죄 억제 효과가 없다고 답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사형이 확정됐다가 ‘무죄’가 밝혀져 석방된 자가 114명이나 된다고 한다. 중국은 경제적으로 개방되었을 뿐 세계 사형집행의 80%를 차지하며, 북한에서는 지금도 수많은 공개처형이 자행되고 있다고 한다. 좌파독재에 대항하는 우파독재 또는 미얀마(버마) 같은 군사정권에서도 정치적 이유로 인혁당 사건 같은 신체고문과 제도적 살인(사형)이 끊이지 않는다. 유엔과 로마 교황청이 사형 폐지를 적극 권장할 뿐 아니라, 국제앰네스티는 한국을 2006년 ‘사형폐지 집중대상국’으로 지정하여 세계 여론을 환기하고 있지만, 정작 한국 사회와 국회 법사위는 인권 후진국에서 깨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한국은 올해로 9년째 사형 집행을 유보하고 있다. 17대 국회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계류 중인 사형폐지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이야말로 억울하게 사형당한 피해자들에게 사회제도적으로 크게 보상하는 것이며, 미국과 일본을 능가하는 인권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지름길이 되지 않을까.엄덕수/법학박사·앰네스티 법률가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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