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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2.01 17:12 수정 : 2007.02.02 10:59

이재승/전남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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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중앙지법은 지난달 23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날조된 정치재판이었음을 인정하였다. 결정 자체는 진일보한 것이지만, 무죄선고를 듣고 통곡하는 유족들을 보면서 국가의 존재 이유, 법의 권위, 법률가의 양심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판결 직후 판결 근거였던 긴급조치의 위헌성을 다투겠다는 변호인 쪽의 결연한 의지도 매우 이채롭다.

긴급조치는 유신헌법에 근거규정이 있으므로 유신헌법의 눈으로는 합헌적일 수밖에 없는데 변호인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변호인은 암묵적으로 전제해 왔던 바로 그 전제의 정당성을 가리자며 사법부를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 긴급조치의 위헌성 논란이 유신헌법 자체의 위헌성으로 확전될 수 있을지는 자못 궁금하다.

긴급조치의 위헌성에 관한 논쟁은 과거청산에서 특수한 의미를 지닌다. 이미 폐지된 법적 조처의 효력을 다투고 있다는 점, 판단 기준이 사실상 헌법의 특정 조항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 등이다. 위헌성을 판단하는 근거는 포괄적으로 법치국가의 기본원칙 또는 정의의 기본원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사법부는 형식적 판단을 우선한다는 구실로 빠져나갈 것이 아니라, 긴급조치를 정면으로 청산해야 할 역사적 과업으로 자각해야 한다.

사법부의 올바른 방향은, 긴급조치가 비록 유신헌법상으로는 합헌적일지 모르나 법치국가의 근본원칙을 유린하는 내용이기에 처음부터 법이 아니며, 긴급조치에 입각한 유죄판결은 따라서 무효라고 선언하는 것뿐이다. 특별히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빌리지 않고서도 재심법원은 독자적으로 이런 판단을 할 수 있고, 헌법재판소도 헌법재판의 형식 속에서 동일한 취지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논증은 이미 독일에서도 전례가 있다. 법철학자 라드브루흐도 나치 악법을 ‘법률의 형식을 취한 불법’이라고 규정하였다.

다른 방법은 국회를 통한 해결이다. 국회가 결의안이나 특별법을 통해 긴급조치는 입헌주의와 법치국가의 기본원칙에 반하므로 법적 효력이 전혀 없고, 그에 입각한 판결도 무효라고 선언하는 방식이다. 나치 패망 후 연합국이 독일점령 기간에 이런 방법을 채택하였고, 독일 정부도 이를 계속 발전시켰다. 공산체제 붕괴후 헝가리도 이런 방법을 활용하였다.

특히 독일의 나치불법판결 청산법(1998년)은 이런 작업의 완성판에 가깝다. 이 법률은 나치체제의 악명높은 특별재판소들의 판결을 전부 무효화했고, 대표적인 나치법령 59건을 처음부터 무효로 선언하였으며. 이러한 법령들에 의거한 유죄판결도 자동적으로 무효화했다. 이에 적합한 우리나라 사례들로는 바로 인혁당 사건의 도화선이 된 긴급조치와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을 처형한 특수범죄 처벌법 등이다. 아울러 혁명재판소나 계엄재판소의 판결도 이런 식으로 정리할 수 있다.

두 가지 방법 중에서 무엇이 합당한 방법인지는 논란이 될 수 있다. 사법부든 입법부든 권한 범위 안에서 청산조처를 해야 한다. 그러나 사법부가 재심을 통해 인혁당 사건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렸으므로 긴급조치와 같은 입법권 유린행위에 대해 이제 국회가 응수해야 할 차례다. 특히 국가폭력의 유산을 정치적 대결 속에 방치하지 말고 여야가 정의구현의 과정 속에 좋은 역할을 진정으로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 이미 과거청산을 통해 도달하려는 민주적 법치국가는 부인할 수 없는 공통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제도정치의 중심부로서 국회는 긴급조치에 관한 무효확인 결의안이나 악법청산법을 조속히 제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진실과 화해의 또다른 표현일 것이다.

이재승/전남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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