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방/이화여대 초빙교수·전 국립경주박물관장
|
기고
지금 서울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서는 대학자, 예술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명품전을 표방한 ‘추사, 문자반야’란 이름의 대규모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최근 소식을 듣고 찾아간 필자는 서예관을 감싼 대형 현수막에 추사의 것으로 표시한 자화상과 글씨를 보고서 한눈에 충격과 불쾌감을 느꼈다. 전시실에 들어가서야 현수막 그림이 자화상이라고 한 것임을 알았다. 신기(神氣)가 전혀 없는 얼굴 묘사를 어찌 추사가 했을까 하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작품들을 광범위하게 모으느라 쏟은 열정과 노고는 치하할 만하다. 하지만 전시를 보니 필체, 도상 등에서 진위가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수준 아래 글씨, 그림들이 무더기로 나왔음을 직감했다. 전시의 핵이라 할 추사 글씨와 그림들 가운데 이처럼 진위가 의심되는 작품이 많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권위 있는 자문위원들의 검증을 거쳐 전시했노라고 서예관 기획자는 말했다. 기획자는 행정적 측면에 치중하였을 것이니, 자문위원들의 의무와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전시 기획 세부까지도 살펴야 하는데, 그런 흔적을 볼 수 없었다. 자문위원들이 모르고 작품들을 골랐을까. 공공기관에서 이런 전시회를 여는 것 자체를 이해하기 어렵다. 혼란스러운 진위 논란으로 추사의 위상이 오히려 나락에 떨어지는 것 같다는 두려움이 생긴다. 예술품 진위 감정은 주관적이어서 객관성이 없으며,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어렵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위작이 점점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 필자가 보기에 그 배경에는 진위를 분별하는 안목 있는 학자가 드물고, 더 나아가 권위자들의 저서에까지도 적지 않은 위작을 참고 도판으로 싣는 현실이기에 이런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서예는 인류가 이뤄낸, 최고로 승화된 예술 장르다. 그림, 글씨를 알아보려면 붓글씨를 상당 기간 써보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획의 질을 알아볼 수 없다. 획의 움직임에 마음도 움직여야 한다. 회화나 서법을 연구하는 사람은 붓글씨를 오랫동안 써서 체득한 바 있어야 글씨나 그림이 보이는 법인데, 그런 수련이 거의 없었으니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요즘처럼 공공·대학 박물관, 화랑, 경매사 등의 서화 전시에 검증되지 않은 작품들이 활개 친 때는 일찍이 없었던 것 같다. 미술사학의 목표는 지식 축적이 아니다. 예술적 감성이 결여된 이들이 상당수 미술사를 가르치고 또한 그런 학생들이 모이니 위작으로 학위 논문을 쓰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위험한 것이 없는데도, 이런 경구가 금언처럼 퍼져 있다. 작품을 먼저 보고 알게 되는 것이지 그릇된 잡다한 지식은 눈을 가리는 법이다. 오히려 ‘아는 만큼 보이지 않는다’고 나는 말한다. 그 총체적 오판과 무능의 결과가 이번 전시다. 주최쪽은 머지않아 세 권 분량의 대형 도록도 낸다고 한다. 지금이라도 위작을 추려낸다면 좋겠으나, 검증 안 된 출품작들이 그대로 실린다면 그들 행적이 두고두고 치욕이 되고, 일반인들에게 혼란을 일으킬 것이다. 추사는 학자이자 예술가로서 학예일치의 경지를 실현했다. 몇 안 되는 한민족의 위대한 얼굴 중 하나다. 그는 귀양지 제주도에서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병마와 싸우며 학문과 예술을 완성했다. 생전에 두 번이나 저술을 태워버린,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한 점 없는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동안 몹시 일그러진 추사의 예술세계를 다시 복원해야 한다.강우방/이화여대 초빙교수·전 국립경주박물관장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