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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4.01 17:45 수정 : 2007.04.01 17:45

류재명/서울대 지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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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골목길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장면. 대낮부터 소주 한잔 했는지 얼굴이 불콰하게 물든 어른이 쪼그리고 앉아 애들을 불러 세운다. “너희들, 누가 싸움 잘 해?” 애들은 서로 눈만 멀뚱거린다. 어른은 계속 경쟁심을 북돋운다. “너, 이 친구한테 이길 수 있어?” 결국 몇 명의 애들이 아무 소득도 없는 싸움을 하고, 어른은 이를 보고 즐긴다.

최근 한국의 어른 몇 분이 애들 싸움판을 ‘본격적’으로 키우자는 목소리를 내는 것 같아 놀랍다. 할일 없는 어른이 골목길에서 심심풀이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명문대학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맨정신’으로 하는 말이다. 교육부의 ‘3불(不) 정책’을 폐지하라고 말이다. 삼불정책이란 본고사, 기여입학제, 고교등급제 금지를 말하는 것이니, 상아탑의 선비들이 점잖은 말로 “똑똑한 애, 돈 많은 애들 못 뽑아 대학이 발전 못하니, 금지를 풀어 달라”는 것이다. 결국 전국의 애들 모아 놓고 “너희들 중 누가 공부 젤 잘해?” “부모님 돈 많은 사람 손들어봐!”라고 하고 싶다는 것 아닌가?

한번 따져보자. 한국 대학 신입생의 학력 수준은 세계의 어느 명문 대학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는 것은 세계가 다 아는 사실 아닌가? 한국 초등학생의 학력은 세계 최고 수준급이고, 중고등학교로 갈수록 학력이 약간 떨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모두 세계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학교 급별로 볼 때 가장 ‘부끄러운 성적’을 내는 곳은 대학 아니던가? 대학 들어갈 때는 ‘공부 좀 한다는 애들’이었는데, 나올 때는 세계는커녕, 국내 시장에서도 별 쓸모가 없는 부실한 인간이 되어 나온다는 것이 한국의 골칫 거리 아닌가? 그런 대학이 입학생 실력 탓하고 있으니, 정말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다.

그리고 큰 돈보따리를 들고 들어오는 학생을 못 뽑기에 대학이 발전 못한다고? 신입생의 학력문제보다는 돈문제가 세계적인 대학으로 발전하는 데 장애가 된다는 말에는 일정 부분 수긍이 가는 면이 있다. 하지만 과연 선진국 대학의 재정적 측면의 경쟁력이 입학생이 들고 들어오는 돈에서 나오는 것일까? 교수들이 따오는 연구비, 그 연구결과로 취득한 지적재산권이 벌어들이는 돈, 성공한 졸업생들이 모교에 내는 기금, 총장들이 발로 뛰어 기업으로부터 끌어들인 기금 등이 모여 남다른 차이를 만드는 원천이 되는 것이다. 결국 돈 버는 어른들이 대학 발전의 밑거름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어른들은 왜 자꾸 ‘애들’ 싸움에 집착하는가? 경쟁이 치열한 국제사회에서 이기는 일이 중요하다면, 어른들이 잘 싸워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자면 고등학생들보다 대학생들이 더 열심히 공부하고, 학생들보다 교사와 교수들이 교육과 연구 ‘시합’에서 더 치열한 경쟁을 벌려야 정상이다. 그리고 학교뿐만 아니라 다른 일터에서도 어른들이 열심히 경쟁하고, 자주 평가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어릴 때부터 죽도록(?) 공부하여 실력을 쌓아 나가도, 먼저 자리잡은 어른들이 철밥통 차지하고 앉아, “나는 열외로 하고, 너희들끼리 싸워라”고 한다면?

우리나라의 어린이와 청소년은 이미 세계에서도 가장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고 있다. 그들에겐 여행을 하고, 명작도 읽고, 남을 돕는 봉사를 하면서 자신의 앞날에 대한 꿈을 키울 수 있도록 여유를 주어야 한다. 정말로 더 열심히 공부하고 경쟁해야 할 사람은 한국의 애들이 아니라 어른들이다.

류재명/서울대 지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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