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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4.06 17:39 수정 : 2007.04.06 17:39

김영환/부경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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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7일은 신문의 날이다. 이 날을 신문의 날로 기념하는 것은 <독립신문>이 창간된 날이기 때문이다. <독립신문>은 최초의 순한글 신문이다. 그러나 신문들은 이 날의 의미를 제대로 생각해 보는 것 같지 않다. <독립신문> 창간사는 절반 이상을 할애해 한글만 쓰는 까닭을 상하귀천이 함께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란 뜻을 거듭 밝히고 있다. 신문들은 아직도 한자와 영어를 많이 쓰고 있다. 마지못해 한글화 추세를 따라 왔지만 한글 문화에 대해 무지와 편견은 여전해 보인다.

최근 어느 한문학 교수가 대학생의 한자 실력이 형편없다는 주장을 내놓자 신문들이 요란하게 이를 전하였다. <조선일보>는 한자 문맹을 타파하라고 사설까지 썼다. 그러나 젊은 세대의 반응은 그런 관점에 거부감이 커 보였다. 시대마다 알아야 할 것은 변하기 마련이고 한자 교양은 이제 개인의 필요에 따른 선택에 맡길 일이 아닌가. ‘한자 문맹’이란 비난은 우리의 오랜 한문 숭상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젊은이에게 옛날처럼 보편적으로 수준 높은 한자 교양을 요구할 수 있을까? 이러한 변화에 대한 판단은 우리 역사와 앞으로 우리말글의 발전 방향들을 여러 모로 생각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부모 이름을 한자로 적지 못한다는 사실이 오래 전부터 한자교육 강화의 좋은 명분이 되고 있다. 그렇지만 홀이름씨는 뜻을 생각하지 않고 소리글자로 적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굳이 이름을 한자로 적을 필요는 없다. 북녘에서도 오랫동안 써 오던 ‘북경’을 버리고 ‘베이징’을 쓰고 있다. 이름을 한자로 적은 오랜 관습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한자를 쓰지 않는 이름짓기를 적극 장려해야 한다. 한자 이름에는 주술적인 색채가 끼어드는 겨우도 많다. 말은 일차적으로 소리로 있다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른바 ‘한자 문맹’ 현상은 우리가 오랜 한자 교양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뜻한다. 이런 변화는 한글 사랑에서 나왔다기보다는 미국말 배우기에 너무 많은 힘을 빼앗긴 데 말미암은 바가 더 크다. 어쨌거나 한문 숭상의 폐해가 컸던 우리 역사를 되돌아본다면 이런 변화는 바람직하다. 한자 교양에는 언제나 사대·모화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따라다닌다. <천자문>이나 <논어>가 갖는 중화주의적 성격도 널리 논의될 필요가 있다.

최근 중국의 국제적 위상과 연관지어 말글 정책을 바꾸자는 사람도 있다. 늘어나는 중국어 교육 수요와 한자 교육을 연결하는 것은 비약이다. 한자가 ‘동아시아의 공통 표기수단’이라며 국제성을 내세우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표어문자(한 문자가 하나의 단어가 되는 문자=표의문자)인 한자에는 중국의 고대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형식적 기호인 알파벳과 다르다. 한자의 국적을 따지는 것은 편협한 생각이 아니다. 비효율적이며 중국 중심적인 한자는 국제성을 띨 수 없다. 한자를 배우는 것과 한글을 발전시키는 것은 볏단처럼 서로 기대고 있다며 둘의 조화를 말하지만, 이런 비유는 듣기에만 좋은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강, 산’이 ‘뫼, 가람’을 삼켜 버린 우리 역사를 보면 우리에게는 맞지 않는 말이다.

새내기들의 한자 실력이 과거보다 못하다고 나무라는 것은 일방적이다. 이를 보는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독립신문>이 보여준 한글 사랑의 역사적 의미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은 것이다.

김영환/부경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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