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4.08 17:18
수정 : 2007.04.08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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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동/<한국방송>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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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 끌려가서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들을 한국과 일본에서는 지금도 ‘종군위안부’라고 부르고 있다. 이 ‘위안부’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한국인들은 굴욕과 분노가 뒤범벅이 된 착잡한 감정에 빠진다. 그러나 이런 쓰라린 역사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들 피해자를 지칭하는 용어다. 요즈음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지만 옛날에는 ‘종군위안부’를 일러 ‘정신대’라고 불렀다. 글자 그대로 보자면 ‘몸을 바치는 부대’라는 뜻이다. 국어사전에는 정신대를 ‘몸을 일으켜 앞장서서 나아가는 부대’ 또는 ‘떨쳐 일어나 앞장서는 부대’라고 정의하고 있다. 제국주의 군대의 성노예로 끌려가 평생을 망친 피해자들을 ‘떨쳐 일어나 앞장선 부대’라고 부르는 것은 모욕이다. 종군위안부라는 말도 그렇다. 종군은 종군기자, 백의종군 등에서처럼 자발적으로 전쟁에 나가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위안부라는 말은 더 거슬린다. 누가 누구를 위안했다는 말인가. 오히려 위로 받아야 할 사람들은 피해자 자신들이 아닌가. 외신에서는 ‘위안부’를 성노예(sex slave)라고 쓰며 완곡어법으로는 위안부(comfort women)라고 부른다는 토를 빠뜨리지 않는다.
‘정신대’니 ‘위안부’니 하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진실을 호도하려고 만들어낸 완곡어법이다. 완곡어법을 영어에서는 유피미즘(euphemism)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좋은 말’(good speech)을 뜻하는 그리스어 에우페모스(euphemos)에서 파생된 말이다. 추악한 현실이나 떳떳지 못한 행위를 가리기 위해 직설적인 어법 대신에 쓰는 에두른 표현을 말한다.
나치 독일이 수백만 유대인을 학살했던 수용소는 ‘죽음의 캠프’(death camp)라고 하는 것보다 ‘집단 수용소’(concentration camp)라고 하는 것이 덜 으스스하다. 첩보 영화에 보면 ‘죽이다’(kill) 대신 ‘무력화시키다’(neutralize)라고 한다. 미군은 전쟁에서의 민간인 살상을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라고 부른다. 물가를 인상하는 것을 당사자들은 ‘현실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인상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강조하며 비난을 피하려는 면피성 속내다.
피해자와 관련 단체들의 줄기찬 노력에도 불구하고 야스쿠니 신사, 독도 영유권 등에 묻혀 관심권에서 멀어져 있던 일제 성노예 문제가, 미국 하원에 관련 결의안이 제출되면서 다시 국제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최근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일본 정부가 성노예를 강제 동원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강변하고 미국 하원에서 결의안이 통과되어도 사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런가 하면 이 문제를 인정하고 사과한 1993년 고노 담화를 무효화시키기 위한 전 단계로 보이는 ‘위안부’ 문제 재조사에 착수할 뜻을 내비쳤다가 국제적 비난여론의 십자포화를 맞았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일본 지도자들의 이런 진실 호도 행위를 “가장 혐오스러운 역사적 수정주의”라고 비판했다.
이런 가운데 일제의 반인도주의적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은 아직도 ‘위안부’라는 멍에를 쓴 채 매주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일본 정부에 대해 역사적 죄과의 인정, 사과, 배상 그리고 올바른 역사교육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1992년에 시작된 수요시위가 750회를 넘었다. 그동안 부지불식간에 써왔던 ‘종군 위안부’라는 말이 그들의 가슴에 또 하나의 무거운 돌을 얹어놓는 일은 아닌지 반성해볼 일이다. 일제의 역사 왜곡과 싸우기에 앞서 우리 안의 식민 잔재를 먼저 청산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김혁동/<한국방송>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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