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4.09 17:19
수정 : 2007.04.09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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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종/경북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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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대선후보 노무현이 승리하던 날 새벽 나절까지 학생들과 축배를 들며 시간을 함께한 기억이 생생하다. 그해가 저물 때 나는 ‘2002년을 보내며’라는 글을 썼다. 월드컵과 ‘미선이-효순이’ 추모집회, 그리고 대선 승리. 이 세 가지를 묶어서 21세기 초두에 우리가 이뤄낸 커다란 성과를 축복하였다. 남들이 인간 노무현을 대수롭지 않게 보았던 시절에는 노사모에 가입하여 작은 힘이나마 보탰고, 지식인 서명에 동참한 적도 있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이제 노무현 정권은 11개월 정도면 역사의 장막 뒤로 사라지게 된다. 그가 내걸었던 슬로건은 ‘참여정부’였다. 문민정부에서 국민의 정부를 거쳐 국민이 ‘참여하는’ 정부를 만들겠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어떠했는가. 대북송금 특검에서 시작하여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경유하여 평택 미군기지 확장 이전을 돌파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으로 나아갔다.(새만금과 부안 방폐장 문제는 논외로 한다.)
나는 참여정부의 모든 결정에 반대했다. 그런 결정을 친미 수구세력의 대표자가 내렸다면 모를까, 어떻게 야만적인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하는 파병을 강행하고, 농투성이로 평생을 살아온 대추리와 도두리 주민들을 강제로 몰아낼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더욱이 미국에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한국 7.4% : 미국 50.5% : 양자 이익 : 35%, 4월3일 <한국방송> 여론조사) 자유무역협정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결론 났다고 득의만면한 얼굴로 선전할 수 있는가.
노무현 대통령은 농민과 어민이 생업을 포기한다면 폐업 장려금을 지급하겠다고 한다. 얼마간의 돈을 쥐여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그 돈으로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는가. 농사꾼이 논밭을 버리고, 어부가 고기잡이를 그만두면 무엇을 하고 살겠는가. 농어민 상당수가 60대 이상 고령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외면하고 있는가. 식량주권을 포기해도 좋을 만큼 자동차와 섬유 수출이 그토록 절박하단 말인가.
우리에게 부모와 나라는 선택이 아니라 ‘운명적으로’ 부여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가혹한 운명이라도 희망이 보여야 인간은 살 수 있다. 투자랍시고 아파트에 투기하는 허다한 로또인생을 양산해낸 ‘참여정부’ 아닌가. 정상적인 생활방식과 상식을 가지고 국민이 살아갈 수 있는 기본적인 토양을 만들어주는 것이 국가와 정부의 최소 역할 아니겠는가. 최고 통치권자가 앞장서서 실업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와 도시빈민과 농어민을 ‘양극화’라는 회생불능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즐거워하는 해괴한 살풍경이라니.
참여정부는 소수의 재벌과 대기업 편에 서서 중소기업과 서민과 농어민을 고통의 한가운데로 몰아넣고 있다. 그리고 호도한다. ‘외부 충격을 동원해서라도 국가경쟁력을 길러야 한다!’ 그렇다면 한 가지만 묻는다. 누구를 위한 국가인가. 미국 표준이 세계 표준이라는 오도된 이데올로기에 함몰된 어설픈 개방만능주의와 시장주의 신봉자들이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 국민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라도 인정하라.
르낭은 “국가는 일상적인 국민투표다”라고 일갈하였다. 일상의 통치행위에 국민들이 참여하고 의사를 표명함으로써 국가는 건강한 생명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국가의 틀 안에서 국민은 의무를 이행한 만큼 행복할 권리가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희망의 싹을 자르고, 가진 자들에게 더 베풀려는 노무현 정부를 참여정부라 부를 수 없다.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던 그날의 다짐을 머리 좋은 대통령이 너무 빨리 잊은 것은 아닌가.
김규종/경북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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