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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4.15 17:28 수정 : 2007.04.15 17:55

박창순/울림기획 대표·전 <교육방송> 본부장

기고

방송의 공익성이 무너진 지 오래다. 오늘날 무수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시청률이라는 주술에 걸린 채 제동장치 없이 질주하는 자동차의 모습을 하고 있다. 물주인 광고주, 위태롭게 운전하는 방송사 임직원, 주인이면서도 손님과 같은 승객인 시청자. 이들 삼자 가운데 가장 피해 보는 쪽은 수동적인 위치에 있는 시청자가 아닐까? 시청자의 진정한 권리는 매장되고 있다.

가령 웰빙 바람에 편승하여 ‘잘 먹고 잘 살자’는 종류의 프로그램을 보면 무엇을 어떻게 먹어야 잘 먹는 것이고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걸핏하면 국외 여행지의 볼거리나 요란스럽게 선전하며 잘 먹고 잘 사는 본질은 외면한 채 흥미 위주에 빠져 있다. 남녀 사이의 삼각관계, 불륜을 다룬 그저 그렇고 비슷한 드라마가 아침시간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방송된다. 연예인들이 신변잡담으로 억지웃음을 자아내는 자기들만의 잔치 또한 넘쳐난다. 평일이고 주말이고 구분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방송법 시행령에는 ‘교양 프로그램은 매월 전체 방송시간의 100분의 30 이상, 오락 프로그램은 매월 전체 방송시간의 100분의 50 이하로 편성하여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그건 ‘규정’이라는 글자로만 존재한다. 이렇다 보니 진지한 삶의 이야기나 사회적 메시지가 담긴 프로그램은 외면받기 일쑤다. 방송의 공적 책임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있다.

늘 잔뜩 긴장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 감각적이고 말초적인 프로그램도 필요하다, 방송은 대중들을 위해 가벼워야 한다, 언제부턴가 이러한 이상한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방송이 가벼움 일색이라면 정말 문제가 아닐까? 방송프로그램은 가벼울 수 있다. 그러나 방송을 만드는 행위는 결코 가벼워선 안 된다.

필자는 최근 <아름다운 거래>라는 공정무역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방송한 적이 있다.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한국, 한국 사람들도 제3세계의 빈곤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지구촌의 가난한 이웃과 더불어 살자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를 본 어느 여고생이 “제3세계에서 노동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받는 농민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 나의 미래를 던져서 한번뿐인 인생을 정말 보람차게 살고 싶다”는 메일을 보내왔다. 다큐멘터리 한 편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해도 한 소녀의 인생관과 의지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거다.

연예·오락 프로그램의 범람은 물론 진지하고 골치 아픈 것 피하고 싶은 세태의 반영이기는 하겠지만, 이런 사회적 현상의 이면에는 시청률 경쟁이 도사리고 있다. 문제는 프로그램의 획일화로 말미암아 방송이 추구해야 할 ‘시청자 복지’라는 가치가 훼손되는 데 있다. 인생에 대해 좀더 진지하게 다가가는 프로그램도 연예 오락물과 공존해야 하며, 소수일지라도 의미 있는 시청자의 시청권은 존중받아야 한다. 다수에만 매몰된 방송 기획과 편성은 진지한 시청자에 대한 정신적 폭력이 될 수 있다. 공공재인 귀중한 전파를 마치 사유물인 양 돈벌이나 생계 수단으로 전락시켜서는 안 된다.

방송은 공공의 책임을 실현하는 우리 모두의 자산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공영방송다운 공영방송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공영방송이 공익성을 최우선으로 삼지 못한다면 다른 대안이 필요하다. 채널 재분배 등의 구조를 바꿔 방송통신 융합시대에 대비하든지,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면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든지 말이다.

박창순/울림기획 대표·전 <교육방송>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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