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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4.20 18:24 수정 : 2007.04.20 19:00

타락사회 겨눈 편협한 도덕
조승희 ‘착란의 방아쇠’ 당겨


미국은 도덕적 부패·제3세계는 편협한 도덕…
조승희의 과대망상은 선-후진국 갈등과 비슷

보도를 보면, 17일에 버지니아 공과대학에서 일어난 엄청난 참극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행사에 부시 대통령과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이 참석하여 애도했다고 한다. 우리도 이 애도를 함께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 사건이 한국 출신 학생이 저지른 것이었다는 사실은 희생자와 그 가족의 슬픔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더욱 깊이 느끼게 한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재미 한국 이민자의 안전을 우려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크게 걱정할 만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나 세계적으로나 이 사건이 한국의 이미지를 손상할 것임은 틀림이 없다. 〈뉴욕 타임스〉는 버지니아 공대에서 가르치고 공부하던, 미국, 루마니아, 페루, 퀘벡, 인도, 중국 등 여러 나라 출신의 교수와 학생들이 한 한국 태생의 학생 손에 목숨을 빼앗겼다고 보도하고 있다.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황우석 사건, 여중생 탱크 치사 사건과 관련된 반미시위, 스포츠 열기, 1982년 희생자 58명을 낸 경남 의령의 경찰관 민간인 살해 사건 등을 상기하고 있다. 한국인의 성급함, 집단주의, 과격성 등을 기억해내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신문은 그간 계속적으로 한국에 대한 보도를 확대해 왔다. 거기에는 한국이 문명세계의 다른 나라와 같은 정상적인 국가라는 전제가 들어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 전제가 달라지는 듯한 인상을 준다.

여덟 살에 이민하여 그 후 15년을 미국에서 성장하고 교육을 받은 청년을 한국인이라는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국내 신문은 물론 외국의 신문도 그러한 점을 부각시키는 감이 있어서, 이것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사건에 두 이질적인 문화의 간격에 사로잡힌 한국 이민자의 문제가 끼어 있는 것은 틀림이 없다. 우리로서는 희생자와 함께 가해자가 처했던 어려움에 대하여서도 동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참극이 벌어진 미국 블랙스버그 버지니아공대 교정에서 19일 한 행인이 멈춰서 사람들이 직접 쓴 추모 메시지를 보고 있다. 블랙스버그/AP 연합

사람 배반-사회 연결했을 가능성

이번 사건을 이해하려면, 사건을 일으킨 조승희 군의 동기를 알아야 할 터인데, 그것을 분명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처음에 수수께끼였던 것이 이제는 조금씩 풀려가는 느낌이다. 처음에 나온 보도에서, 그를 집단 살인의 엄청난 범행을 저지르게 한 직접적인 동기는 사귀던 여자 친구가 그를 배반하고 다른 연인을 가지게 된 것에 대한 분노였다고 한다. 그 이후 보도는 이것이 별 근거가 없는 것이라는 설을 내놓았다. 그보다 남학생이든 여학생이든 전혀 사귀는 친구가 없는 외톨이였던 것이 문제점이었던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의 심리적인 문제를 이야기하는 다른 보도는 영문학과 학생이었던 그가 문예창작반에서 썼던 작품들이 극히 어두운 내용을 가진 것이었다는 점을 들추고 있다. 작품의 하나는 젊은 주인공이 자기 친아버지를 죽였다고 믿는 의붓아버지를 살해하는 내용의 것이라고 한다. 창작반의 지도교수는 그가 제출하는 작품들이 너무나 폭력적이고 병적인 내용을 담은 것이어서, 그 사실을 학과장에게 보고하고 이 학생을 계속 가르쳐야 한다면, 자신이 사표를 내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고 한다. 창작반 교수 니키 조반니는 널리 알려진 흑인시인이다. 그녀의 시에는 가난과 인종차별의 문제를 다룬 것이 적지 않다. 조군의 작품 내용이 어지간한 것이었다면, 조반니 교수는 그렇게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또 다른 사실들이 그의 마음 상태를 드러내준다. 공책에 쓰인 글에 , “돈 많은 애들,” “퇴폐,” “젠체하는 사기꾼들”과 같은, 버지니아 공대 학생들을 타매하는 말들이 있고 “이런 놈들을 죽이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단편적인 보도들로 하나의 가상적인 투시도를 만들어 보면, 그는 여자친구에 배반당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버지니아 공대 또는 미국 사회 전체의 도덕적 부패의 책임으로 돌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내밀한 인간관계는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그가 미국 사회를 부도덕한 것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징벌하여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중 들어온 소식은 이러한 생각이 일시적인 발작 상태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래 마음에 지녔던 것이라는 증거가 드러난다는 사실을 전한다.

그러나 여자친구 관계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사회가 한 사람의 행동과 삶의 궤적에 대하여 안다는 것은 극히 힘든 일이다. 그의 행동 방식 자체는 한 사람의 배반과 사회를 연결시킨 결과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의 생각에 크게 잘못된 것은※그의 생각을 심각하게 취한다고 할 때※사회 전체에 대한 판단과 느닷없는 사람들을 하나의 인과관계로 묶어 놓은 것이다. 오사마 빈 라덴이 부시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책임을 물어 미국인은 누구든지 살해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한 것처럼 그는 전체 상황에 대한 결론으로 일정한 개인들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정당화된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팔에 쓰여 있던 ‘이스마일’은 허만 멜빌의 〈모비 딕〉에서 침몰한 포경선 피코드호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선원 ‘이슈밀’일 수 있다. 피코드는 흔히 자본주의 기업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조군은 이 배가 침몰할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슈밀 또는 이스마일에게 자신을 비교한 것일까?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영문학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이스마일은 ‘모비딕’ 최후 생존자

이러한 연관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망상의 한 뿌리가 분명 경직된 도덕주의에 있다는 사실이다. 버지니아 공대생이나 미국을 도덕적 타락이라는 눈으로 보게 하는 관점은 이미 그의 가정적 배경에 들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의 가난을 탈출할 목적으로 미국으로 이민하여 세탁소를 경영하여 생활의 기반을 잡고 아이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는 데 성공한 건실한 생활인이다. 그것은 희생과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을 것이다. 조군은 이러한 집안에서 이미 엄숙한 인생철학을 습득하였을 것이다. 기숙사 동료들의 말로, 그는 으레 밤 9시에 자리에 들고 새벽 5시면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았다고 한다. 그에게 다른 학생들의 생활은 돈과 퇴폐와 거짓의 생활로 보였을 수 있다. 그러나 마음에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버지 살해를 내용으로 한 그의 연극은 아버지의 권위를 벗어나고 싶은 무의식적 욕구를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이민자는 청교도 후계자”

실용적 도덕주의는 한국 이민의 태도 일반에서 발견된다. 영국에서 이민하여 미국에 정착한 작가 조나단 레이반의 책에 〈가슴 아픈 씨(氏)를 찾아서〉라는 미국 견문기가 있다. 거기에는 이민해온 한국인 이야기들도 들어 있다. 그가 만난 한국인은 조금도 한눈을 팔지 않고 일하고 돈을 버는 일에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람들이다. 그는 이민자들 가운데 한국인이야말로 기독교의 노동윤리와 17세기 영국 이민의 청교도주의의 후계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 한국인 목사는 미국을 쾌락과 오락과 유혹의 나라라고 규탄하고 그의 사명은 한국 이민들이 이러한 미국의 부패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어느 성공한 사업가는 자기 딸이 미국인과 결혼하게 되는 것을 크게 걱정하고 그런 경우 딸을 죽여 버리겠다고 말한다. 레이반은 미국 사회를 별로 고운 눈으로 보지 않는다. 책 제목의 ‘가슴 아픈 씨’(Mr. Heartbreak)는 미국을 근면하고 성실한 자작농의 낙원으로 그린 18세기의 프랑스인 여행자 크레브쾌르의 이름의 뜻을 풀어 놓은 것이다. 오늘의 미국에는 크레브쾌르가 그린 농부보다 가슴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레이반이 일과 돈과 편견과 독선에 사로잡힌 한국 사람들을 곱게 보는 것은 아니다.

시야를 조금 넓혀 볼 때, 미국 사회를 부정적으로 봄으로써 자기를 정당화하고 방어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한국인만이 아니다. 이슬람 근본주의의 현대적인 시조로 간주되는 사이드 쿠트브의 정신적 각성은 그의 미국 견문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1948년부터 1950년까지 미국에 유학하고, 미국이 여러 가지로 부패한 나라라는 판단을 내린다. 세속적인 광고 전략을 사용하는 데 서슴이 없는 미국의 기독교 교회와 젊은이들의 문란한 성윤리는 그것을 입증하는 중요한 근거였다. 본국 이집트로 돌아간 다음 그는 이슬람형제동맹을 창설하여, 오늘날의 이슬람 근본주의※그리고 그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그 연장선상에서※테러리즘의 정신적 토대를 놓았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영문학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소위 후진국의 사람들이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을 도덕적으로 부패한 나라라고 보고, 선진국 사람들이 후진국의 사람들을 편협한 도덕주의에 빠져 인간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라고 보는 것은 오늘의 세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자기방어 이데올로기다. 이러한 시각이 많은 단순화와 모순을 포함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도덕적 부패나 편협한 도덕주의가 어느 쪽에 더 많은지, 그리고 제국주의의 오만과 그 피해자의 왜곡된 심리, 어느 쪽이 더 사태를 보는 눈을 뒤틀리게 하는지※이것들을 정확히 가려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렇기는 하나 사실과 심리의 왜곡이라는 문제를 떠나, 개인이나 국가가 일정한 정신적 기율이 없이 오래 살아남을 수 없고, 편협한 도덕주의가 사람의 삶에서 관용과 평화를 빼앗아가는 것은 틀림이 없다.

한국인은 지금의 시점에서 이 두 가지 이데올로기 모순 속에서 심리적 사회적 갈등을 가장 강하게 겪고 있는 국민인 듯하다. 조승희 군의 정신착란 또는 망상은 이러한 갈등에 관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의 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현실적 모순과는 별도로, 이러한 부질없는 이데올로기적 갈등에서 벗어나는 것은 한국인이 당면한 시급한 과제의 하나라 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세계의 모든 사람 앞에 놓인 세기의 과제이기도 하다.

고려대 명예교수/영문학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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