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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5.06 18:03 수정 : 2007.05.06 20:04

전용관/크리스챤신문사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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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한테 맞았느냐?’ 형제는 용감했다. 어린 시절 이야기는 추억이 되었다. 형제 중 누구라도 맞고 들어오는 날이면 형제들은 비상모임(?)을 소집한다. 억울하게 당한 일이면 밤이 새기 전에 끝장을 보고 만다. 아버지는 형제애를 과시하는 자식들을 보며 ‘허어, 그놈들’ 하고 모른 척한다. 자식들 쌈박질에 아버지는 늘 뒤편에 서 있는 입장이었다. 자식이 맞았는데 속상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결코 나서는 법이 없었다.

최근 한화그룹 총수가 아들 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연일 톱뉴스로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사건에 세인들의 입방아는 그치질 않는다. ‘누구한테 맞았느냐?’ 아버지는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 옛날 정서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자식이 맞은 대로 그대로 재현하리라’고 다짐했을 아버지의 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애지중지 키워온 아들의 얼굴에 난 상처를 보고 놀라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아들의 이런 모습에 아버지가 발끈하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지나친 ‘자식사랑’에 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고 오직 물리적인 보복과 앙갚음만 있었다.

평범한 아버지였다면 뉴스가치는 떨어진다. 사실 해결사(주먹)를 동원할 능력도 없을뿐더러, 결코 겁나는 일에 뛰어들지 않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가 누구인가. 그는 한국 경제를 이끄는 10대 그룹 총수 중 한 사람이다. 아들의 피해에 그는 돈도, 법의 해결도 필요치 않았던 것 같다. 오직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공식밖에 몰랐던 게 아닐까. 더 서글픈 것은 사건 발단이 고급 술집이라는 데 있다. 아들은 엄연한 학생 신분이다. 고급 술집에 못 갈 이유는 없겠지만, 세인들은 술집, 그리고 종업원, 조직폭력단, 기업총수 등을 들먹이는 기사에 흥분한다. 나아가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의 총수가 아들을 때린 가해자를 납치 감금해서 보복성 폭력을 행사했다, 기업 총수가 그렇게 할 일이 없냐는 등으로 비아냥거렸다. 세인들은 한마디로 ‘한 편의 삼류 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며 씁쓸해한다.

‘빗나간 자식사랑’은 기업의 대내외 이미지를 크게 훼손하며 글로벌 기업으로서 오점을 남겼다. 경찰, 검찰의 조사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간에 세인들은 한 기업 총수의 빗나간 아들사랑에 대해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이 사건을 접하기 전 미국 버지니아공대의 총기난사 사건이 떠오른다. 33명이 숨진 전대미문의 엽기사건으로 남을 이 사건은 의외로 차분하게 진행된 듯한 느낌이 든다.

자식을 잃은 33명의 부모의 심정을 어떻게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겠는가. 억장이 이미 무너져 내린 부모의 심정, 자식애가 먼 나라 이야기라고 해도 좀처럼 삭여지지 않는다. 이 소식을 접한 지금까지 자식 잃은 부모가 가해자 가족을 원망하고, 가해자 부모를 찾아가 원성을 샀다는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는다. 속이야 어떨지 몰라도 모두가 겉으로는 피해자라고 체념한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녀, 게다가 명문대를 다니는 명석한 자녀를 두었다고 뿌듯해했을 부모들을 떠올리면 남 일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사건의 아들도 미국 명문대에 다니는 학생이다. 술집에서 일어난 아들의 쌈박질로 기업 총수 아버지가 연루됐다는 보도는 해외토픽감이다. 아무 이유 없이 싸늘하게 죽어간 아들·딸과 술집에서 얻어터진 아들을 보는 부모의 심정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일 게다. 자식의 죽음을 차분하게 바라보는 부모와 아들이 몇 대 맞았다고 폭력을 행사한 아버지가 오버랩된다. 후자는 국가경제를 대표하는 공인, 대기업을 이끄는 총수. 그의 ‘자식사랑’이 유치하게만 보인다.

전용관/크리스챤신문사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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