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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5.14 17:51 수정 : 2007.05.14 17:51

양해경/용인성폭력상담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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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는 두려움에 떨며 드러내기를 무서워하여 숨어 지내는데 가해자는 오히려 주위 사람들의 옹호를 받으며 거리를 활보한다. 증거란 오로지 피해자의 진술뿐, 오히려 가해자가 증거를 대라며 큰소리 친다. 여러 정황을 보아서 심증은 분명하나 물증은 없다. 피해자는 한 사람을 지목하여 일관되고 정확하게 자신에게 피해를 주었다고 진술하는데, 지목된 그 사람은 전혀 그런 사실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옆에서 망을 본 사람이 있었고 그 인적사항을 분명하게 설명하는데도 수사를 담당한 사람은 그의 소재가 분명치 않다며 조사를 서두르지 않는다. 피해자는 고립무원인데, 가해자는 여러 종류의 사회적 권력과 인적자원을 동원하여 사건을 없었던 일로 하려고 한다. 주위에 사건이 알려지면 여론에 밀려 그제서야 제대로 된 수사가 진행된다. 확산된 여론을 의식하여 마지못해 피해자가 제시한 물증을 받아들인 수사관은 피해자에게 오히려 ‘왜 이제사 물증을 내놓느냐’고 한다. 그럼에도 사회적 시선이 없었다면 사건은 묻혀 버린다. 피해자는 역으로 명예훼손 등으로 삶이 더 힘들어진다. 문제가 잘 해결되면 피해자는 고통을 잊고 이를 계기로 새로운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이는 최근 사회면을 장식한 한화그룹 총수 보복폭행 사건 이야기가 아니다. 성폭력 사건의 수사과정에서 진행되는 스토리다. 성폭력은 피해 당사자는 물론 그 가족의 일상적인 생활까지도 파괴할 수 있는 괴력을 가진 사건이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고 피해자가 생각 끝에 어렵사리 사법기관에 신고하면 처리 과정에서 위와 같이 진행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피해자는 성폭력으로 말미암은 일차적인 고통 말고도 이를 드러내고 신고하였다는 이유로 이차적 피해를 봐 힘들어 한다. 그러나 가해자는 이런저런 이유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혐의로 처리되는 것이 관례 아닌 관례였다.

성폭력 신고가 무혐의로 처리되고 나면 이제부터 피해자에겐 또 다른 차원에서 고난의 행군이 온다. 곧 가해자로부터 역습을 받아 명예훼손이나 허위사실 유포 등으로 고소당하기도 하는데, ‘증거가 없다, 증인이 없다, 오로지 피해자의 진술뿐 다른 입증방법이 없다’라는 이유를 단 수사기관의 면죄부가 이들 가해자들을 적반하장으로 만드는 것이다.

피해자는 대체로 경제적 사회적 약자인 데 비해 가해자는 인적 네트워크도 넓고 사회적 지위, 권력, 경제력 등 모든 면에서 피해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에 피해자가 소송을 당하게 되면 그야말로 고스란히 당하게 되는 것이다. 비단 성폭력뿐만 아니라 한화그룹 총수 폭력사건에서 보듯이 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의 피해를 드러내지 못하고, 2·3차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 검색 상위 순서에 오르고 세간의 관심이 많아져 유야무야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된 수사(일반인들의 시각에서는 적어도 그렇게 보이는)를 하고 있는 재벌 총수 폭력사건의 진행 과정을 눈여겨 보면서 어쩌면 그렇게도 그동안 진행되던 성폭력 수사 진행 상황과 닮았을까,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사회가 변하고 있다. 재벌 회장이 보복폭행 사건으로 구속되는 일이 처음으로 일어났다. 재벌 회장이라는 이유로 봐줘선 안 된다는 사법정의를 보여준 점에서 그나마 가슴 한쪽을 쓸어내린다. 일반 폭력이든 성폭력이든 이제는 사회적 약자가 겪는 인권 침해에 대해 사회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양해경/용인성폭력상담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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