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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5.25 17:34 수정 : 2007.05.25 17:34

방선주/재미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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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일본 우익 평론가 가세 히데아키가 <뉴스위크> 국제판에 쓴 칼럼을 읽다가 실소해 버렸다. “위안시설은 상업시설이었고 미군 기록에도 명료하게 위안부를 창녀(prostitute)라고 썼다”고 단언한 부분을 보고 그 아비에 그 아들이란 생각을 했다. 모리 세이유우라는 자위대 간부가 쓴 <외무부의 큰 죄>라는 책을 보면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외교의 실세이자 히데아키의 부친인 가세 도시가즈의 왜곡된 필법에 대한 야유가 14쪽에 걸쳐 적혀 있다. 또 그 아들 히데아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뉴스위크>에서 그를 ‘역사가’로 소개하면서 객원논설위원으로 대접하며 지면을 할애해 줘도 국내에서는 어떤 비판도 하지 않는 것 같다. 가세의 망언은 반박할 가치가 없다손 치자. 그런데 요새 일본 우익 쪽에서 요란하게 들고 일어나는 논점이 ‘순사 초임이 월 45엔이었는데 전쟁 말기에 군위안부 300엔 모집광고가 신문에 났으니 강제가 웬말인가’라는 것이다. 전쟁 초기에 노동자들을 남양으로 데려가는 미끼가 통상 월급의 3배를 준다는 것이었지만 떼죽음을 당해도 한푼 못받은 가족이 수두룩했다. 그러니 전쟁 말기에는 미끼를 300엔 정도로 올려야 간호보조원인 줄 알고 가는 여성들을 꾈 수 있었던 것이다.

가나이 에이이치로라는 육군 경리학교 졸업 소위가 쓴 (1986)를 보면 이러한 사정을 짐작하게 된다. 그가 처음 복무한 만주 제1사단 주둔지에는 군 경영 위안소 2곳이 있었는데 그는 담당상관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이 여성들은 여자정신대라든지 여자 애국봉사대라는 이름 아래 조선의 시골에서 모아온 듯하네. 18세에서 23세까지의 독신여성들로 군복의 수선, 세탁 등의 봉사를 한다는 설명 아래 강제징용인 것으로 안다. 와서야 일의 내용을 알고 경악했겠지만 이제 와서는 어찌할 자유가 없다.” 이 책의 내용을 개괄하면 서술의 진실성을 간파할 수 있다. 사실상 위안부들에 대한 강제성을 줄기차게 제기한 사람들은 한인보다 일본인들이었다. 1970~80년대에는 날조라고 일본 우익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요시다 세이지의 책 말고도 사기성 강제연행 기사는 많고도 많다. 반드시 우물가나 길가에서 잡아간 것이 ‘강제연행’이 아니다. 이에 관해 시급히 주간지에 실린 글의 목록이나 내용을 집대성할 필요가 있다. 또 요새 일본 우익 잡지에 범람하는 위안부 논점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는 인터넷 사이트를 개설했으면 한다.

이런 가운데 위안부 문제에 매달려온 정진성 서울대 교수가 네덜란드에서 힘들게 입수한 ‘위안부 강제동원 문서’ 원본 공개를 두고 “처음이냐 아니냐”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난 일은 유감이다. 그때까지 나돈 문서들은 영어본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거나 서툰 부분 인용에 불과했기에 그 원본문서의 의미는 더없이 중요하다. 필자도 얼마 후에 <전장 터에서의 위안부와 노무자>라는 책을 낸다. 미국 자료에 근거해 중요하게 다룬 부분이 밀레섬에서의 한인 노무자들의 반란사건이다. 사건 개요는 굶주린 일본인 노무자들이 한인 둘을 잡아 먹었고 이에 분격한 한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일본군인 7명을 죽였으나 한인 약 30~100명이 도살당하고 70명(명단 있음)이 바다에 대기한 미국 군함을 향하여 헤엄쳐 가서 구조된 사건이다. 미국은 이를 “한인 노예노동자의 반란”이라고 적었다. 이 사건의 부분은 지난해인가 일본 쪽 자료에 근거하여 국내에서 발표된 바 있고, 필자의 조사로는 처음 발표된 것이 1990년대였다. 좀더 진전한 ‘처음’인 것이다. 또 “처음이 아니다”라고 할 것인가. 기사 보도에서 신중하길, 위안부나 노무자를 연구하는 학자들을 따뜻하게 지지해 주길 바란다.

방선주/재미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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