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6.08 18:31
수정 : 2007.06.08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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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평화협력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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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쌀 문제로 남북 사이에, 방코델타아시아은행(BDA) 문제로 북한 미국 사이에 한랭전선이 형성되고 있다. 북핵과 관련한 2·13 합의서에 한국을 비롯한 6자 회담 당사국들이 서명한 이후 한발짝도 앞으로 나가지를 못했다. 그런 상태가 벌써 넉 달째를 맞고 있다.
미국이 가장 당황하고 있다. 비디에이 북한 동결자금 처리를 두고 국무부와 재무부 사이의 힘겨루기가 벌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이제 더는 비밀이 아니다. 현재로서는 재무부의 판정승으로 끝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미국 국내법 절차에 따라 걸리는 시간은 국무부의 애초 예상보다 더욱 길어져 북한의 초기이행 조처도 자연히 연기될 전망이다.
6자 회담 미국 쪽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는 최근 상황을 비디오 게임에 비유하기도 했다. 단계가 높을수록 힘들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밧줄을 당길수록 매듭은 더욱 세게 묶일 수밖에 없다. 극적인 돌파구가 마련되지 않으면 북핵 문제가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다. 부시 행정부의 인내가 점차 한계에 가까워졌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북한 역시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지난 1일 “영변 핵시설 폐쇄의 마지막 걸림돌을 제거하는 것은 미국에 달렸다”며, 미국 쪽이 먼저 이행할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앞서 김명길 유엔주재 북한대표부 차석대사 역시 비디에이 송금이 제대로 이뤄져야 핵시설 동결을 위한 초기 조처가 실행될 수 있다고 했다. 북한 역시 매듭을 풀기보다는 더욱 조이겠다는 심산이다.
21차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도 북은 남쪽에 조속히 쌀을 보내줄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하지만 정부는 북한이 2·13 초기이행 조처를 하지 않으면 쌀 선적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여러 차례 공언해 왔다. 그 결과 이번 장관급 회담은 차기 회담에 대한 구체적인 일정조차 잡지 못한 채 사실상 결렬되었다. 처음부터 충분히 예견된 결과였다.
북핵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부시 행정부의 끈질긴 설득력이 ‘전술적으로’ 적중한 셈이다. 쌀 지원은 비디에이와 맞물려 있기 때문에 쌀을 실은 배가 비디에이 해결 전에 떠나는 것에 대해 국내 여론이 호의적이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역사적인 철도 개통 등으로 한껏 고조되어 있던 남북관계가 이로 말미암아 당분간 경색 국면으로 흐를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문제는 미국이 북핵 문제에 대해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 주느냐다. 북한은 이란의 농축 우라늄에 대한 최근 미국의 협상 태도에서 부시 행정부 외교정책의 흐름을 읽어내야 한다. 행정부내 온건파의 입지가 점차 좁아지고 있는 마당에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질타하고 나서는 의원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차라리 이참에 북한이 한번 ‘통큰 정치’를 하여 국제적인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활용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팽팽해진 밧줄을 칼로 자르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가기 전에 북한이 먼저 매듭을 느슨하게 하여 풀 수도 있음을 보여 달라는 것이다. 북한도 현재의 교착상태에 원인 제공을 한 당사자로서 적극적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할 의지를 보여야 한다. 그럴 경우 남쪽의 쌀이 예상보다 빨리 북한 지역으로 건너갈 수 있다. 동시에 북-미 관계 정상화에도 순기능을 할 것임은 자명해 보인다.
북한이 한국과 미국의 ‘진정성’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면 예상외로 큰 수확을 얻을 수 있다. 북한이 실천 가능한 것부터 먼저 행동으로 옮길 경우 실타래처럼 얽힌 북핵 문제의 해법이 뜻밖에 쉽게 마련될 수 있다.
이병철 평화협력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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