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종환/동국대 명예교수·민족화합운동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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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대선을 앞두고 정치인들의 말잔치가 난무하고 있다. 박근혜 한나라당 경선 후보의 ‘경선 출마 성명’도 그중 하나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대에 고통 받고 핍박받았던 모든 분들에게 아버지를 대신해서 깊이 사과드린다고 했다. 그에게서 이런 사과의 말을 듣기는 처음인 것 같다. 그러나 그의 말은 듣는 이들에게 감동을 주기 어렵다. 말과 행동이 따로 놀기 때문이다.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 고통 받고 핍박받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국가보안법’의 독소조항을 적용받은 사람들이었다. 민족일보 사건, 인혁당 사건, 민청학련 사건 등 여러 반인권적 사건들에서 보안법으로 사형 등 중형이 선고되었다. 6월 항쟁의 불을 댕긴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도 보안법의 테두리 안에서 저질러졌다. 보안법에 대해서는 대법원마저 위헌의 요소가 있다고 인정한 바 있으며, 유엔 인권위도 그 폐기 내지 개정을 요구한 바 있다. 박근혜 후보는 “국가보안법의 일부 순기능마저 없앨 수는 없고 악용의 소지가 있는 조항에 대해서는 국민이 충분히 납득하고 안심할 수 있도록 개정할 것”이라고 밝혀왔다. 그러나 보안법을 폐지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버텼고 수구언론이 이에 가세했다. 그 후 보안법 개정 논의는 물밑으로 가라앉은 채 독소조항은 그대로 엄존한다. 과거사를 정리하려면 보안법을 일단 폐지하고 나서 대체입법을 하는 것이 순리다. 박 후보가 “아버지 때문에 고통 받았던 모든 분들에게 사과한다”고 한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박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구태의연한 ‘보안법 파동’을 일으킬 위험은 상존한다. 박 후보가 자기 아버지 때문에 고통 받았던 분들에게 대신 사과하려면 무엇보다 보안법을 폐지할 수 없다고 버텼던 한나라당의 정책이 잘못이었음을 솔직히 시인하고, 이 반인간적인 법률을 폐지한 뒤 대체입법을 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러지 않고 말로써 사과한다고 이를 곧이들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박 후보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철석같은 신념으로 지켜내겠다”고 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가로막아온 것이 바로 보안법 체제였다. 이 보안법 체제 아래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여지없이 짓밟혔다. 보안법 체제 아래서 거대 재벌만이 활개칠 수 있었고, 시장경제 질서는 철저히 유린되면서 외환위기 사태로 이어졌다. 박 후보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철석같이 믿는다면 우선 보안법 체제부터 바꾸겠다고 공약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 후보가 우선 할 일은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는 “평화를 정착시켜 남북이 공동 발전하도록 하고, 통일의 기반을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그러나 그와 한나라당의 많은 당원들이 올해 3·1절에 시청 앞에서 대형 태극기와 미국 국기를 내걸고 6·15 공동선언의 파기를 요구하고, 김대중·노무현 전·현직 대통령을 ‘빨갱이’로 매도하고, 김정일 타도,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 중단을 외치는 뉴라이트들의 집회에 참석해 격려했다. 이런 언동과 ‘평화’ ‘남북 공동 발전’ 운운이 어떻게 일치하는 것인지. 이것만이 아니다. 박 전 대통령의 인권유린을 사죄하고자 하면, 박 후보가 ‘정수장학회’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그 재산을 국고에 헌납해야 한다. 이런 진솔한 행동을 보이지 않고 앞뒤가 맞지 않는 언동으로 일관한다면 국민의 마음은커녕 한나라당원들의 마음마저 얻지 못할 것이다.주종환/동국대 명예교수·민족화합운동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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