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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6.20 18:03 수정 : 2007.06.20 18:03

이정학/서해농장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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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 결과의 우위는 전략을 지녔을 때 가능하다. 작전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온갖 목소리들을 다 가두고 미국과 황망히 체결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살펴보면, 정부의 협상작전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 같다. 처음부터 작전, 아니 최소한의 밑그림도 없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

관세 유예기간 설정을 보자. 일반적으로 통상협상에서 관세 유예기간 설정은 수입 충격을 완화해 자국 생산자들을 보호하자는 것인데, 이번 협정에서 정부 당국자들은 충격이 큰 냉동 돼지고기는 짧게 하고(7년), 오히려 지난해 돼지고기 전체 수입량의 5%에 불과한 냉장 돼지고기(10년)는 길게 설정하는 결정적 어리석음을 범했다. ‘긴급 수입제한 조처’ 역시 마찬가지다. 수입 충격을 방어하려는 장치인데, 충격이 클 냉동 돼지고기에는 방어막이 없고 충격이 적은 냉장 돼지고기에만 방어막을 설정했다. 너무나 간단한 계산이어서 어리둥절하다.

쇠고기 긴급 수입제한 조처도 그렇다. 한국시장을 75%나 잠식하는 27만톤에서 시작해 매년 6천톤씩 늘려 15년차에는 한국시장을 99%나 잠식한 상태에 다다른 35만4천톤에서야 이 조처를 발동한다는 얘기인데, 이 상황이라면 그야말로 ‘게임 오버’ 상황 아닌가. 미국산 쇠고기가 최대로 수입된 2003년에 미국산 쇠고기 수입량이 19만9000톤이었고, 최근 6년간 국내 평균 소비량이 35만8천톤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계산법이 가능하단 말인가.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처음부터 정부 당국자들은 미국이 내민 협정문을 그대로 받아들인 탓이다. 우리나라 공무원들이 기본적인 산수도 못하는 사람들이 아니잖은가. 미국이 냉장기술이 발전해 가는 단계라 이를 고려했다는 정부 관계자의 변명은 차라리 안 들으니만 못하다.

수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기업양돈장에서 4년 동안 실무를 익힌 후 양돈장을 설립해 16년을 경영해 왔다. 그동안 남이야 알아주지 않아도 국민들에게 제2의 주식을 공급한다는 소박한 신념으로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 온갖 사회적 홀대를 참아내며, 천직으로 여기고 지켜왔던 양돈업을 타의로 포기해야 하다니 착잡한 마음뿐이다.

양돈 분야가 다른 축산업종에 견줘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있다고는 하나 미국과 비교해서 생산비가 갑절이나 든다. 더구나 미국산 쇠고기가 밀려 들면 국산 돼지고기와 가격 차이가 없기 때문에 간단히 대체될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유럽연합(EU)과 자유무역협정이 맺어지면 더 심각해진다. 양돈 분야에 관한 한 유럽의 경쟁력이 미국보다 앞선다. 그러나 아직은 희망의 끈을 놓을 수는 없다. 아무리 값싸게 바꾸어 먹을 수 있는 교역품 정도로 생각해도 생명산업을 지켜가야겠다는 작은 믿음만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재협상 테이블에서는 미국이 주장하는 의제만 재협상할 게 아니라 농업분야도 거론해야 한다. 미국 정부의 막대한 농업보조금 지급 문제, 당연히 꺼내야 한다. 우선 어이없는 실수를 만회할 길은 돈육 관세기간을 냉동육(15년), 냉장육(10년)으로 재조정하는 것이다. 이 정도 기간은 확보돼야 이 나라 양돈업이 최소한의 경쟁력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돈육 관세 유예기간 7년을 냉동육에서 냉장육으로, 10년을 냉장육에서 냉동육으로 바꾸기라도 해야 한다. 또한 쇠고기 긴급 수입제한 조처를 27만톤이 아닌 10만톤에서 시작하여 6000톤씩 15년간 늘리는 안으로 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 양돈업계는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단행해 이 정도의 경쟁력이라도 갖출 수 있었다. 여기에는 우리 농산물을 믿고 신뢰해 준 국민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어려운 때지만 신뢰를 지켜갈 수 있도록 더욱 안전하고 맛있는 돼지고기 생산으로 보답할 것이다.


이정학/서해농장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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