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열/고루살이 쌀학교 도농교류포럼 준비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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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생물이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외면하고 뭇생명과 서로 어울림의 관계를 끊은 채 지내는 사람을 생태맹이라 부른다. 마치 쓰레기더미 속에 금을 그어놓고 자기가 자리잡은 쪽만 치우면 모든 것이 깨끗하고 아무 일 없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이들이다. 자연계의 모든 것은 인간이 부르면 달려오고(와야 하고), 모자라면 언제든 갖다 쓸 수 있는 화수분쯤으로 여기는 어른들도 숱하다. 1970년대 초 박정희 때는 구호가 판을 치는 시대였다. ‘80년대가 되면 집집마다 자가용이 1대’이고 ‘수출 1억불, 소득 1천불’ 시대가 된다는 표어가 거리마다 넘쳐났고, 개발과 성장이란 구호들이 일상을 뒤덮었다. 20년이 지난 오늘, 땀 흘린 사람들 덕택에 구호는 현실이 됐다. 꿈을 이루고 보니 이제는 집집이 주체 못할 자동차가 애물단지다. 아파트를 짓는다고 산을 허물고, 공장 돌릴 물을 얻기 위해 강을 막은 개발은 ‘지구온난화’라는 부메랑이 되어 우리 삶을 후벼 판다. 숲을 베어내고 논밭을 걷어낸 자리는 홍수와 가뭄 같은 이상기후가 차지했다. 한반도가 열대지방이 되어 소나무가 사라지고, 남극 얼음이 녹아 펭귄이나 백곰을 볼 수 없고, 불어난 바닷물에 태평양의 작은 섬 ‘나우르’가 잠기는 것이 더는 소설 속 모습이 아니다. 그래도 우리는 내 집안의 시원함을 위해서라면 뜨거운 에어컨 바람이야 얼마를 뱉어내든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모는 자동차에서 내뿜는 배기가스가 지구를 더럽혀도 창문만 올리면 그냥 남의 일이다. 하지만 뜨거워진 지구별이 비틀거리자 사람들의 삶터는 흔들리기 시작했고, 사람의 생존을 지켜주는 많은 생명이 사라지는 지경이 되어서야 차 창문을 내리고 무슨 일인지 두리번거린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뭐했냐며 이쪽저쪽에서 자성의 목소리라도 들려오니 늦었지만 다행이라고나 할까. 지구별을 지키고 인류의 앞날을 이어가자면 생애 최초 교육기관인 유치원부터 자연계에서 모든 생물이 함께 살아가는 ‘생태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인간의 성장 과정에서 5~9살 어린이만이 자연과 눈높이를 나란히하고 교감을 나눌 수 있는 나이라서 그렇다. 바로 그때가 생태맹을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한 시기인 것이다. 노르웨이나 스웨덴 같은 나라에서는 유아시절부터 생태교육을 시작한다는데, 우리도 이제 생태교육의 내용과 의의를 짚어보고 시행을 서두를 때가 되었다. 다른 종과 자연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생태교육을 하는 첫머리다. 지렁이를 만지고 나무의 숨소리를 들어보는 것은 모두 뭇생명을 존중하고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몸에 배이도록 하자는 뜻이다. 또 아이에게 내 몸으로 시작하여 우리 집-자연-미래와의 관계맺음을 체득하게 할 일이다. 내가 누는 똥이 자연과 순환하고, 우리집 차가 뿜는 매연이 다시 내 몸으로 돌아옴을 깨우쳐 주자. 자연과 생태를 표현한 캐릭터를 이용한 플래시카드로 아이들 오감을 열고 생태와 자연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프로그램도 좋다. 우리나라에선 ‘희망나무공동체’에서 진행하는 유치원 생태 프로그램 정도가 거의 유일하다. 이 공동체가 펼치는 생태교육의 목표는 “이 땅의 모든 어린이가 ‘어린이햇볕발전소’의 주주가 되는 것”이라며 “부모들이 자녀와 함께 앞날을 가늠해 보고 작은 실천을 이끌어내는 것이 유치원 생태교육의 마지막 지향점”임을 강조한다. 생태교육? 사실 별 거 아니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지구별의 장래 주인공인 어린이와 자연에서 함께 살아가는 뭇 생명도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은 남겨두고, 눈치껏 쓰자는 말이다. 어른들은 아이들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고도 꼭 그렇게 펑펑 다 써 버려야 속이 시원할까.김시열/고루살이 쌀학교 도농교류포럼 준비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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