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8.07 17:34
수정 : 2007.08.07 17:34
|
이상현/한국납세자연맹 정책위원
|
기고
이용자의 80%가 소액예금 가입자, 주주의 80%가 소액주주, 종업원의 95%가 주주인 은행. 저소득층 거주 지역에 단 한 푼의 수수료도 떼지 않는 현금자동지급기(ATM)를 설치하고, 전체 여·수신사업 중 서민금융의 비중을 15%까지 늘리겠다고 공언하는 은행. 본점을 포함한 모든 점포에서 재생전기를 쓰며, 사이버머니로 지급하는 보너스로 종업원들이 자녀와 보낼 시간을 살 수 있도록 보장하는 한편, 이용자들에게는 경영자료를 가감없이 공개하는 은행.
이런 얘기를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빈곤층 자활을 돕고자 무담보 무보증으로 돈을 꿔주는 ‘소액 신용대출 운동’(마이크로 크레디트)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놀라지 말자. 이 은행은 자산 규모나 영업성과 측면에서 지구촌 전체 은행 중 14위에 올라 있고, 영국에서 네번째로 큰 은행이며, 미국의 경제월간지 <포천>이 고른 500대 글로벌 기업 순위 58위에 오른 은행이다. 주인공은 영국의 시중은행인 에이치비오에스(HBOS)다.
이 은행은 무려 100억파운드(18조7879억원)를 소외계층 모기지 대출 재원으로 집행했으며, 지역 공동체에 4420만파운드를 투자했다. 영국 정부에 내는 법인세 규모도 막대하다. 지난해 인기몰이를 했던 이 은행의 예금상품은 이자도 많이 줘 최고 판매상품이란 영예를 거머쥐었다. 은행이 출연한 두 복지재단을 통해 800만파운드를 기부했으며, 이는 한 해 전보다 갑절이 늘어난 규모다. 불필요한 출장비를 아낀 종업원들에게 ‘그린 마일’을 지급해, 기부 재원으로도 활용한다. 이 회사 대표이사는 “환경을 생각하는 일터는 더 나은 복리후생 등 궁극적으로 종업원들에게 보탬이 돌아가게 하고, 기업의 소유권은 더 나눠질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전세계 지점망까지 합쳐 7만4000명이 이 은행에서 일하며 먹고 산다. 지난해에는 일터 식구들이 2.3%가 늘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자화자찬’이 섞였을 수 있다. 최근 주식값과 대손 위험 등 재무전문가들의 분석을 고려하면 이 회사에 대한 고평가에는 약간의 거품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용자에게 보통예금 금리 연 0.1%를 주면서 자기 돈 1만원을 찾아갈 때도 최고 1200원의 현금인출 수수료를 받는 한국의 은행들만 보다가, 낯선 외국은행의 보고서를 마주하니 사뭇 부럽다. 우리나라에서도 몇몇 지방은행들이 튼실한 사회 책임금융을 실천하고 있지만, 대다수 시중은행들은 이런 의제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선진국들은 지금 환경·인권·노동·지배구조·사회공헌 등 지속 가능 경영의 과제를 사회적 책임지수 국제표준(ISO26000)으로 만들어 교역이나 거래의 기준으로 삼으려 준비하고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말할 때 은행업은 여럿 중 하나인 업종으로 다뤄질 수 없다. 물론 지금은 국내 대기업들의 은행차입 의존도가 낮지만, 중장기적으로 불가피한 재생에너지나 온실가스 저감 설비 등 친환경 설비투자는 은행의 도움 없이 불가능하다. 은행의 지속 가능 경영 자체가 기업의 그것을 가늠케 하는 잣대라는 해석이 그래서 가능하다.
한국의 시중은행들이 눈속임 금리나 덤터기 수수료를 주된 수입원으로 삼고 있는 한, 이런 얘기는 여전히 먼 나라 전설일 뿐이다. 그러나 은행이 자기 업종이 생겨난 당시의 초심으로 돌아가 ‘돈만 버는’ 경영이 아닌 ‘공동체를 이롭게 하는 경영’을 하겠다고 마음먹는다면, 먼 나라 외국은행의 지속 가능 경영 보고서는 충분한 참고서가 되리라 본다. 마음가짐을 바꾸면 좋은 영업성과와 ‘지속 가능한 기업’ 이미지로 충분히 보상받는다는 게 ‘지속 가능 경영’을 말하는 전문가들의 한 목소리다.
이상현/한국납세자연맹 정책위원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