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치환/의인이수현재단설립 총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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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8·15 광복을 기념하는 축제가 곳곳서 펼쳐졌다. 진보와 보수단체들은 제각기 광복을 축하하는 행사를 벌였지만 진정 우리에게 광복은 미완의 과정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얼마 전 한국과 일본이 맞붙은 아시안컵 축구 3, 4위전에서 우리 선수들의 투혼은 정말 눈물겨웠다. 본선에서 연거푸 세 경기나 치른 연장전에 지칠 대로 지친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경기 후반 선수 한 명이 퇴장당하고, 이에 항의하던 감독과 코치마저 퇴장당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 선수들은 끝까지 투혼을 발휘해 연장전까지 치러 승부차기로 승리를 마무리했다. 상대가 일본이 아니었더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일제 36년의 통한이 뼈저리지만, ‘절대 일본엔 질 수 없다’는 민족의식이 젊은 세대에도 여전히 전수되고 있음에 한편으론 반갑고 한편으론 우려가 앞선다. 행여 배타적 민족주의에서 비롯된 과잉 반응이라면, 열린 미래를 지향해야 할 한민족의 앞날에 경계해야 할 점이 아닐까 싶다. 일본은 여전히 미워하고 응징하고 이겨야만 할 대상인 것이다. 일본에서의 한류 바람과 더불어 순항하는 듯한 한-일 관계는 독도에 부딪혀 좌초 위기에 놓였다. 일본은 북관대첩비 반환, 한국민 비자면제와 같은 유화책을 취했지만, 이는 미봉책에 불과했다. 그간의 한-일 양국의 화해 무드는 다친 곳의 근원적 치료 없이 환부에 가루약 처방만 한 꼴이었다. 정치·경제·역사인식 문제와 교류협력 분리원칙을 주장하는 학자들 주장 또한 실현 불가능한 한계성을 지녔음을 지난 10년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지난달 31일 미국 하원이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을 만장일치(435명)로 채택했음에도 아베 총리는 자성보다 “결의안 채택은 유감”이란 말로 대신했다. 한-일 관계의 정체를 극복하고 그들의 닫힌 마음을 열어 줄 근원적 해법이 필요한 때다. 종교, 인종, 계층간 사회통합을 이룬 프랑스의 ‘톨레랑스’ 정신처럼, 일본인에 내재한 ‘화’(和) 사상은 이질적인 실체와 마주칠 때 공감대를 형성하고 더불어 공생을 도모한다. 이 사상은 다른 나라나 민족에 배타적이어도 안 되고 물리적인 힘을 사용하거나 전쟁을 해서도 안 된다고 가르친다. 지구촌이라는 하나의 울타리 안에 살고 있는 인류로서 공동체 의식을 갖자는 뜻이 이 ‘화’ 정신에 내포되어 있다. 일본에서 유치원 때부터 남에게 피해주기를 금기시하는 교육이 바로 이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한·일의 정체성을 풀어갈 블루오션 해법이 바로 ‘화’ 정신에 있다. 그들의‘화’ 정신에 불을 지핀 이가 이수현이다. 6년 전 지하철 선로의 일본인을 구하다 숨진 이수현은 일본의 심장을 펄떡이게 하면서 ‘이수현 신드롬’을 불러왔다. 또한 일본에서 ‘쉬리~이수현~한·일 월드컵~한류’의 맥을 이었을 뿐 아니라, 일본인들로 하여금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바꾸게 했다. 한류야 한 시대의 문화현상으로 사라질 수 있지만, 일본에서 이수현은 불멸의 생명체로 존재한다. 지난 2004년 도쿄에서 열린 ‘한-일 합동 이수현 3주기 추모식’에 손수 반찬을 만들어와 “기운 내시라”며 이수현의 부모를 위로하던 일본 할머니, “고인을 닮고 싶다”며 찾아왔던 불치병 소녀 등 일본엔 그들 같은 선량한 많은 양심들이 있다. 이제 6년여 산고 끝에 ‘의인이수현재단’ 탄생을 앞두고 있다. 현해탄의 푸른 바다 위로 아름다운 무지개 다리를 놓자. 그 다리를 통해 태평양으로, 5대양으로 한국인의 베품과 생명 중시, 의와 헌신적 인류애를 세계만방에 전하고 진정한 광복의 기쁨을 누리자.노치환/의인이수현재단설립 총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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