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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8.31 17:48 수정 : 2007.09.18 17:14

박진규/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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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일 넘게 억류돼 있던 19명의 피랍자들이 석방됐다. 참 반가운 일이다. 이번 사태의 본질에는 민간인을 납치·억류하고 두 생명을 빼앗기까지 한 탈레반 세력의 비인도적 행위에 있으며, 이는 엄중한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아프간의 정치상황, 이 속에서 미국의 역할, 한국군의 파병 등 고려해야 할 상황적 요소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들이 인간의 생명을 해치는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이번 사태는 한국 개신교(기독교는 개신교와 천주교를 총칭)에 큰 숙제를 안겨주었다. 다른 문화권에 대한 이해를 결여한 선교 행태를 자성할 것은 물론이지만, 그보다 무겁게 다가오는 건 개신교를 향한 우리 사회의 차가운 시선이다. 30일 개신교계가 자성의 뜻을 표명하고 몇 가지 대책을 제시했지만, 더 깊은 차원의 성찰과 지혜가 필요해 보인다. 개신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런 노력이 좋은 열매를 거두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난 40여일은 우리 사회가 개신교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를 그 어느 때보다도 명확히 드러내주었다. 처음 피랍소식이 전해진 뒤 가상공간을 뜨겁게 달구었던 개신교 비판은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뜸해지나 싶더니, 석방 합의 발표 이후 다시 거세지고 있다. 인터넷 공간이 갖는 특성 때문인지, 비물질적 가치를 향한 개인의 열정과 헌신까지 무참히 폄훼해 버리는 공격적 언행도 별 저항 없이 게시되고 퍼져나간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개신교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건 처음이 아니다. 최근의 이랜드 사태를 비롯해서, 조금만 더 거슬러 올라 사학법, 종교인 납세문제, 학원내 종교자유, 개신교내 윤리적 문제와 세습 등 교회와 관련된 사회문제들이 불거질 때마다 반복되어 왔다. 특히 인터넷상에서는 종교와 관련된 논의만 시작되면, 거의 예외 없이 개신교 대 비개신교의 대립 구도가 만들어졌다. 개신교의 반대편에는 비종교인뿐 아니라 천주교와 불교 등 다른 종교인들까지 쉽게 하나가 되어 대립각을 세운다.

이런 비판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을까? 얼마 전 영화 <밀양>을 보면서 개신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선이 잘 녹아들어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 영화가 제기하는, 아니 우리 사회가 제기하는 개신교 비판의 핵심에는 소통 문제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신과의 소통과 이웃과의 소통 사이에 나타나는 불균형이다. 영화에서 신애는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범인이 신으로부터 얻은 용서와 구원 때문에 정작 자신으로부터의 용서에는 그리 절박하지 않음을 확인한 후 신을 회의하기 시작한다. 이후 신애의 눈에 비친 교인들과 그들의 집회는 너무나 생뚱맞다. 신애를 위로하는 그들의 언어도 자식 잃은 아픔의 절절함에는 턱없이 공허하다. 한국은 남미와 함께 세계에서 몇 안 되는 개신교 성장지역으로 꼽힌다. 하지만 그 성장의 결과는 이웃과의 소통에는 실패한 채 신과의 소통에만 집착하고 만족해하는 폐쇄적 집단이라는 우리 사회의 인식이다.

한국 사회에서 개신교는 이미 하나의 강력한 권력으로 자리잡았을 뿐 아니라 기득권 세력과 외세의 대변자로 그려진다. 물론, 교회가 ‘세상’의 목소리를 전부 다 들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교회’와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세상의 목소리가 자성과 개혁을 촉구하는 교회 내부의 소리와 큰 차이가 없다면 귀기울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올해 개신교회는 평양 대부흥 100주년을 기념하는 여러 행사를 치르고 있다. 이런 행사를 통한 이벤트성 회개운동보다는 이번 사태가 한국교회가 진정한 회개로 이어지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박진규/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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